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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09:46최종 업데이트 26.06.17 15:43

미완성 교향악이 더 멋질 수 있으리라

[제2부 - 박정희와 J. P.] 피는 물보다 짙다

1961년 5. 16. 당시 상황과 박정희- JP 인척 관계를 잘 아는 어느 분의 말씀이다.

"5.16. 쿠데타는 박정희 - JP의 공동작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5·16 쿠데타는 JP가 기획, 연출한 작품으로, 거기엔 언젠가 그런 꿈을 꾸었던 박정희는 JP가 만든 가마에 올라탔다. 그래서 박정희는 18년 간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지금은 고인인 분이 오래전, 나에게 하신 그 말씀은 두고두고 5.16. 쿠데타의 정곡을 꿰뚫는 말씀으로 여겨졌다. 다시 <JP의 증언록>을 들춰 본다.

박정희와 김종필 처삼촌과 조카 사이인 박정희와 김종필
박정희와 김종필처삼촌과 조카 사이인 박정희와 김종필 ⓒ 김종필 기념사업회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이 성공했음에도 자유당 말기의 암울함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이어 들어선 장면 내각은 국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정부의 무능과 함께 국가 안보의 초석인 군(軍)은 썩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다. 하지만 정부는 어쩔 줄 몰랐다. 혼돈은 점차 극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해(1960년) 6월에는 경찰관들의 데모가 있었고, 9월에는 초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가 신문의 주요 면을 장식했다. 1961년 3월 21일에는 대구에서 횃불 시위가 벌어졌다. 혁신계 정당과 일부 대학생들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폐지하라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한 것이다.

육사 8기생인 나는 1,300 여 명의 동기생 가운데 한국전쟁으로 절반을 잃었다. 나로서는 이 혼란스러운 풍조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군 수뇌부의 부정 ․ 부패 ․ 무능 문제를 제기하면서 3성 이상 장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整軍) 운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 나는 영창에 갇히고 군복을 벗었다. 게다가 나의 처삼촌(박정희 소장)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당시 헌병감은 나를 협박했다. 나는 1961년 2월 15일 군복을 벗고, 곧이어 19일 대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이제는 혁명을 해야겠습니다."
"그래? 나도 이런 때가 오리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지."
두 사람은 굳게 손을 잡았다.
이후 4월 7일, 서울 명동의 한 호텔 건물 옥상에서 쿠데타를 모의하던 동지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박정희 소장을 모시고 올라갔다.
"자! 여기를 보라! 이분이 우리를 이끌 분이시다."
그 순간 '와! ' 하는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박정희 소장이 그들에게 말했다.
"구국의 순간이 왔다. 지금이 나라를 구할 절호의 기회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게 아니다."
간결함이 박정희 다웠다. 그날 핵심 동지 29명은 육사 2기 박정희 소장, 5기생 4명, 8기생 16명, 등 기타 10 여 명이었다.
- <김종필 증언록Ⅰ> 1 – 4장 '이분이 우릴 이끌 분이다. '축약

이들은 1961년 5월 16일 이른 아침,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마침내 박정희 육군 소장이 대한민국의 전권을 움켜쥐었다. 여기에는 당시 한국 상황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보이지 않은 어떤 실세의 원격 조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의 처지에서 피 지배국 관리자는 내부의 강자를 지목하는 게 관례다. 이에 관한 얘기는 나는 후일, 다른 글(소설)로 이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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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는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그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그때마다 JP는 견마지로의 충성을 다하여 박정희를 도왔다. 공화당 창당 자금으로 빚어진 이른바 3분 폭리 사건, 꽉 막힌 한일회담 타개를 위해 '김 ․ 오이라' 메모,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을 앞두고 빚어진 '국민 복지회 사건', 등 그러한 정권의 위기 때마다 박정희는 JP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코 정권 배턴만은 JP에게 넘기지 않고 독식했다. 하지만 JP는 섭섭했을 테지만 박정희에게 대항치 않고, 2인 자 자리에 자족 하면서 당신의 큰 뜻(대권)은 접었다.

이로 볼 때,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 원만하게 지속한 것은 "피는 물보다 짙다"라는 세간의 말로 풀이하고 싶다. 만일 그 두 분 사이가 피를 나눈 그런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JP는 김형욱처럼 박정희에게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JP가 박정희에게 정면 도전하여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처럼 처절한 권력 투쟁을 벌였을 것이다.

내가 전해 듣기로는 박정희는 위기 때마다 친조카 박영옥을 청와대로 불러 JP의 도움을 간접으로 청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박영옥은 삼촌의 말씀을 아버지 말씀 이상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분의 중재로 두 사람 관계가 더 이상의 위험 선을 넘지 않았을 거로 풀이하고 싶다. 최근 조카(박준홍)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10· 26 때 시해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삼촌(박정희)은 적당한 때에 JP에게 배턴을 넘겼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박정희는 JP에게 배턴을 넘기지 않은 가장 큰 결정적 이유는 그(JP)의 그릇은 최대 '국무총리' 정도라고 인식을 한 것 같았다. 설사 박정희 대통령이 JP에게 배턴을 넘기더라도 그가 당대의 호적수인 다른 두 김(YS, DJ)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곧 그들에게 투항, 정권을 빼앗길 것으로 박정희는 곧 불을 보는 것처럼 훤히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신 사후, 우여곡절 끝에 JP는 3당 합당이라는 명분으로 김영삼 밑에 들어갔다. 하지만 JP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DJP 연합'이라는 명분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세 번째 국무총리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얼마의 시일이 지나자 'DJP 연합'도 물 건너갔다. 그러자 JP는 또다시 DJ 진영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던가?

김종필 박영옥 부부 금실 좋기로 소문난 만년의 김종필 박영옥 부부
김종필 박영옥 부부금실 좋기로 소문난 만년의 김종필 박영옥 부부 ⓒ 박준홍

내가 세 차례 직접 만나본 JP는 풍류를 즐겼던 인물이다. 나는 JP의 처남(박준홍)으로부터 당신 생애의 중요한 행사에 두어 차례 초대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행사에 한 번도 참석지 않았다. 후일 이를 몹시 후회하다가 작가는 적당한 거리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본 그 옆모습을 포착하여 스케치하는 게 독자에게 더 정직한 그림을 보여줄 것으로 생각을 굳혔다.

작가는 '글의 주인공이나 유족을 가능한 피하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러한 불문율을 가능한 한 지키면서 이제까지 글을 써왔다. 나는 작가로서의 천재일우의 그 기회를 놓친 데 대한 아쉬움 대신 평소 내 소신을 견지하였다고 그에 대한 후회를 접었다. 나는 정말 운 좋게 3김 세 분을 직접 만나 인사와 악수도 한 바, 언젠가 틈 보아 '내가 만난 3김'이라는 제목의 글도 쓰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번 김종필 총리 탄생100주년 기념행사에는 가능한 참석 하고자 한다. 그래서 박준홍 후배에게 다음의 문자를 보냈다.

"초대 감사합니다. 건강에 문제없으면 가능한 참석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끝내 2인 자로 끝났다. 긴 역사로 볼 때 대권을 잡지 못한 채, 미완으로 끝난 JP가 더 명예스러울지도 모르겠다. YS를 보라. 평소 (대권) 공부는 하지 않고 주먹만 휘두르다가 어느 날 대권을 잡고는 나라 살림을 죽 쑤지 않았는가. JP로서는 재주는 부리고 대권은 차지하지 못해 좀은 억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미완성 교향악이 더 멋질 수도 있으리라. 음악뿐 아니라 우리 인생도 그럴 지도.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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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parkdo45) 내방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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