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평택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한 조국혁신당 조국 후보가 4일 경기도 평택시 선거사무소에서 선거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얼마 전 30년 지기인 선배와 술잔을 기울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선거 이야기가 나왔고 정치인 조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증오가 느껴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언급했다. 역시 깊은 미움이 느껴졌다. 방송인 김어준, 작가 유시민, 정청래 민주당 당 대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선배는 그 모두를 미워했다.
눈앞에서 처음으로 '문조털래유'를 목격한 순간이었다. '문재인' '조국' '털(김어준을 지칭, 얼굴에 털이 많아서 생긴 별칭)' '정청래' '유시민'에서 한 글자씩 따온 '문조털래유'는 어느 순간 문제투성이 집단으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최근엔 이 계보가 점점 넓혀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긴 대화를 하다 보니 선배가 이들을 싫어하는 맥락이 보였다. 선배는 이재명 대통령을 좋아하고 윤석열 전 대통령을 싫어했다. 윤석열이 탄생하는 데 문재인 대통령이 너무나 큰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다. 조국도 그 연장선상에 놓였다.
김어준은 과거 이재명을 폄하했고, 정청래 또한 지금 이재명과 적대 관계에 있다고 판단했다. 유시민은 이들과 한편으로 봤다. 선배가 받아들인 세계는 단단했다. 나는 그렇게 느낀 적이 없다고 하자, 선배는 각종 증거들을 들이댔다. 그건 해석의 영역이라고 하자 선배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치인 조국에 대해선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치열한 대화는 새벽에서야 끝났다. 중요한 것은 설득이 아니라 차이를 아는 것이다. 나는 선배에게 이제 정확히 차이를 알았으니 더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면서 쉴 것을 권했다. 이튿날 생각을 정리하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이 문제였다
법이 문제였다. 선배는 조국이 이미 판결받았고, 그 판결만으로도 충분히 죄질이 나쁘다 했다. 그 이유로 선거에 나선 것, 정치를 하는 것, 민주당 옆에서 기웃거리는 것 모두 틀렸다고 판단했다. 내가 판결문을 읽었다면 과연 내 태도가 달라졌을까. 선배가 내가 말한 또 다른 증거들을 읽었다면 태도가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유는 우리 모두 법 안에서만 사고하고 대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3권 분립이 기본이다. 입법, 사법, 행정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한다. 사법에서 처벌받았다 해도 요건이 되면 선거에 나설 수 있다. 국민 심판을 받아서 입법부에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 사법에서 처벌받았다 해도 행정부 수장이 사면을 통해서 족쇄를 풀 수 있다.
아무리 국민이 지지해서 입법부에 들어가고, 행정부에 들어가도 사법부는 이들을 가둘 수 있다. 서로가 견제하면서 민주주의가 유지된다. 민주주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한쪽이 일방 권력을 가지면 위험해진다.
민주주의와 법을 지키는 시민의식은 같이 성장했다. 꽤 오랫동안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입법부에 대한 신뢰보다 높았다. 그 결과 은연 중에 법을 만능으로 여기는 심리적 토양이 자랐다. 더불어 정치와 입법부에 대한 불신과 조롱이 패키지처럼 움직였다.
꽤 오랫동안 관심있게 들었던 한 정치평론가는 정치인들이 검찰에 불려다닐 때마다 "국민들에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에요. 일부 정치인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예요. 여기에 우리가 왜 열을 냅니까"라고 했고, 그 말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힘 있는 정치인들조차 죄 없이 당할 정도면 힘없는 일반인들은 과연 어떨까. 법 앞에서 정치인들은 무관한 이들이 아니라 본보기에 가깝다.
행정부 수장이던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사법부가 단죄를 내리면서 사법부와 이를 집행한 검찰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그 연장선상에서 검찰의 수장이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꽤 오랜 기간 법이 민주주의를 지킨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법 만능주의가'가 자리 잡았다.
학교 문제를 변호사가 해결?
이번 6.3지방선거에서 공약집을 넘기다 한 교육감이 내건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변호사 전담 보호망'이란 단어였다. 선생님은 가르침에만 집중하라는 내용이 덧붙었다. 교권 추락, 학내 갈등 심화가 이 시대 학교의 화두다. 그 문제를 '변호사'가 나서서 해결한다는 게 그 교육감이 내건 공약이었다.
세상에. 끔찍했다. 학교에서 학생들끼리 사소한 갈등이 생기면 그때마다 '법대로 해' '변호사 불러'란 말이 난무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아이들끼리 화해하고, 부모들과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어서 문제를 푸는 건 어렵다. '법대로'는 쉽다. 이게 과연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일까. 갈등을 법에다 맡기는 '법 자본주의'나 다를 바 없다.
법의 기준과 국민의 기준은 다르다. 사법, 행정, 입법의 기준 또한 다 다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균형과 견제가 필요하다. 2024년 12월 국회에 계엄군이 쳐들어갔을 때 나는 바로 깨달았다. 저건 틀렸다. 민주주의가 저래선 안된다. 법 이전에 이건 국민 상식이다.
설령 헌법재판소나 사법부가 다른 판단을 내렸더라도, 나는 법조인들이 틀렸다고 믿었을 것이다. 사법부의 판단과 국민의 판단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당시 국회 앞을 메운 수많은 국민이 붙잡았던 것은 법 조항이 아니라 바로 '민주주의적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선배 말대로 정치인 조국은 사법부의 판단을 받았다. 유죄를 받았다. 그건 사실이다. 동시에 국민들은 다른 판단을 해서 그에게 정치할 기회를 주었다. 상호 견제에 따라 한쪽은 처벌했고, 한쪽은 기회를 줬다. 민주주의가 작동한 것이다. 이번에 국민들은 다시 조국이 정치할 기회를 거두어갔다. 그것 또한 민주주의 작동의 결과다.
선배는 일관되게 검찰과 사법부 판단을 내밀었다. 나는 지금 검찰과 사법부를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꽤 오랫동안 쌓아온 민주주의 경험의 역사가 검찰과 사법부 내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고 믿는다.
나는 선배에게 사법부의 판단만큼이나 당원과 국민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선배는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거냐"며 되받았고, 나는 "존중은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의 절대 진리일 수는 없다"고 답했다.
지금부터 열심히 고민해야 할 건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우리 내면에 깊숙이 뿌리 내린 '법 만능주의'와 '법 자본주의'를 조금씩 걷어낼 때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