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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둥만 남은 떡갈잎 고무나무(뒤에 있는 잎들은 꺾꽂이 했더니 뿌리가 나서 심어둔 잎들입니다) ⓒ 정혜영
나는 일명 '식알못(식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게 식물은 잘 모르는 영역이자, 애써 관심 주었다가 절망에 가까운 슬픔의 경험이 너무 많은 대상이다. 그동안 나를 스쳐간 수많은 꽃과 식물들을 제 명까지 못 살리고 보낸 죄로 따진다면, 지옥행 열차 첫 칸 예약 확정이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꽃 식물류를 선물로 받는다면 "고맙다"는 말 뒤로 복잡해지는 감정을 숨겨야 한다.
수목림을 옮겨 놓은 듯한 지인의 베란다를 보면 경이롭지만, 세상에 저절로 그리 되는 일은 없으므로 제 분수를 알고 부러움에서 그칠 뿐이다. 이제 그런 나를 알고 몇 년 전부턴 가까운 지인들은 웬만하면 꽃 화분 선물을 하지 않아서 다행히 더 이상 내 손으로 생명을 죽이는 죄는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은 날
그럼에도 내가 끝내 식물을 죽이고 마는 사람인지, 아직 최종 심판은 나지 않았다. 남편 회사에서 이사 선물로 들어와 9년째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떡갈잎 고무나무 때문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우리 집에서 초록 잎을 피워낸 식물은 없었으므로, 다음 단계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기둥 가지의 둘레가 굵어지길 멈추더니 가장 꼭대기에서 새 잎이 올라오면 아래 잎들 중 하나가 떨구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식알못인 나라도 식물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 그리 긍정적이진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삽목 6주 후, 잎이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어요. ⓒ 정혜영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서투른 내가 건드렸다가 겨우 연명 중인 생명마저 손상 시킬까 두려웠다. '식집사(식물집사)' 친구를 불러 화분 갈이를 부탁했다. 친구가 와서 식물을 뒤엎은 날, 다시 지옥행 열차 티켓창이 열린 듯했다. 흙 밖으로 드러난 뿌리는 힘 없는 머리카락 같았다. 그렇게 짧고 가는 뿌리로 어찌 그동안 그 긴 몸뚱이를 지탱하고 있었을까? 중심 기둥이 너비를 넓힐 수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로지 새로 돋아나는 이파리를 키워내기 위해 쥐어 짜냈을 이 아이의 안간힘, 그 소리 없던 아우성이 느껴져 안쓰러웠다.
식집사 친구의 응급 처방으로 흙 밖으로 드러난 앙상한 뿌리는 영양제를 섞은 물에 담겼다가 비옥한 새 흙으로 채운 화분에 다시 심겼다. 다시 뿌리가 융성해지길, 나무 기둥도 튼튼해지길 기도했다. 그러나 그 후 꽤 시간이 지나도 나무에 큰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식물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는 내게 와서 이 고생이냐... 떡갈잎 고무나무를 향한 혼잣말만 늘어갔다.
물과 양분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나무 전체가 건강하지 못한 듯했다. 결단이 필요해 보였다. 검색해 보니 꺾꽂이 또는 '삽목(揷木)'이라는 식물 번식 방법이 눈에 들어왔다. 식물에서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고 잘라낸 부분을 흙이나 물에 심어 새로운 뿌리를 내리게 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반려 식물을 살리려면 뭔가 해야만 했다. 남편이 소장하고 있던 목공예 톱으로 잎이 달린 나무의 윗부분 가지를 잘랐다. 깨끗한 물을 담은 물병에 영양제를 풀어 자른 가지를 꽂았다. 제발 뿌리를 잘 내리기를...
문제는, 잎이 달린 윗 가지를 자르고 남은 나무 몸뚱이 부분이었다. 원래 계획은 잎이 달린 가지들만 잘라내 살리고 가녀린 몸뚱이는 어쩔 수 없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무를 뽑으려고 힘을 주니 버티는 힘이 상당했다.
흙갈이 후 뿌리가 좀 더 튼튼해졌나? 식물을 잘 모르기는 나나 남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어쩌나... 서로 난감해하다 윗부분은 잘라 내고 아랫부분만 남겨 보기로 했다. 이미 눈에 보이는 가지는 다 잘린 터라 생장점이 남아 있을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위대한 사랑을 만드는 일'

▲삽목 6주 후, 잎이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어요. ⓒ 정혜영
그때부턴 홀로 남은 떡갈잎 고무 나무의 시간이었다.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식물이 살 수 있을까?
솔직히, 그대로 죽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그래도 그 정도로 버틸 수 있는 뿌리라면...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한 주, 두 주...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잎이 없어서 광합성을 못하는데 어떻게 나무가 살 수 있겠어? 막연했던 기대를 접었다. 잎이 없으니 물을 많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얘가 얼마나 버티려나... 하며 들여다본 날, 화들짝 놀랐다. 나무 둘레에 작은 초록 잎이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몇 군데 빼꼼 잎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메말라 보였던 나무에도 군데군데 생장점이 살아 있었다니. 이 아이가 한 달 동안 몸부림치며 또 얼마나 생명의 기운을 끌어 모았을 것인가!
떡갈잎 고무나무는 생장점에 잎이 움트자 무서운 기세로 잎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잎이 큰 식물답게, 그 몸에 새겨진 유전자가 생명을 키워가는 기세는 놀라웠다. 이 아이가 무참히 죽음으로 내몰렸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인지 감격인지 모를 전율이 온몸을 훑고 갔다.

▲삽목한지 한 달 후, 생장점에서 싹이 나기 시작했어요! ⓒ 정혜영
책 <내게 남은 스물 다섯 번의 계절>에서 저자 슈테판 셰퍼는 "위대한 사랑을 만드는 모든 일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썼다. 아름다움은 금방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위대한 사랑까지는 아닐지라도 사랑을 만드는 일엔 긴 시간과 노고가 필요하다. 우리 집 떡갈잎 고무나무도, 나에게도.
물병에 꽂아두었던 나무 가지도 무성히 뿌리를 내려 이제 화분에 옮겨 심을 때가 된 듯하다. 이제부터 우리 집 떡갈잎 고무나무는 두 그루 형제 나무로 자랄 것이다. 홀로 외로이 버텨낸 끈질긴 생명력이 두 개의 몸이 되었다.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두 그루 식물이 서로를 응원하며 오래도록 건강하게 자라주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