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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인터넷이나 SNS에 자신의 글과 사진을 참 쉽게 담아낼 수 있는 세상이다. 글을 쉽게 쓰고 쉽게 지우는, 지우개도 필요 없이 지운 흔적도 없이 쉽게 지우는 세상이다.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만 켜면 생각과 일상을 올릴 수 있어 참 편리하지만,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글들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 저편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장롱 속에 있는 묵은 옷가지를 정리하다가 손수건 만한 작은 헝겊 하나를 발견했다. 헝겊에는 8년 전에 써 놓았던 즉석 시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구겨진 천을 펴기 위해 다리미를 가져와 조심스레 밀어보았다. 천 위에 삐뚤빼뚤 적힌 두 줄의 문장이 선명하게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두려고 다리미로 반듯하게 편 8년 전의 즉흥 시 구절 ⓒ 김종섭
"너의 말이 오늘 싱거운 건, 내 마음이 짜기 때문일까? - 김종섭의 <소금> 중에서, 2018. 04. 13"
이 글을 쓴 것은 지난 2018년의 일이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지인의 문학회를 따라 강화도로 문학 기행을 떠났다. 마침 고향인 강화로 떠나는 여행이라 더 감격스러웠다. 어린 시절 고향 강화읍내에 거대한 방직공장이 있다는 소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던 거친 기계 소리와 함께 활기찼던 고향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또한 고향의 상징처럼 제일 큰 공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자라는 동안에는 그 공장에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 속에만 묻어둔 채 영영 가보지 못할 뻔한 곳이 될 뻔했다. 다행히 그 해, 문학회 회원들과 함께하는 문학 기행 덕분에 마침내 오랜 고향의 유산과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처음 발을 디딘 그곳은 예전의 방직공장 모습 그대로 가동되지는 않고 있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공장 자리에는 거대한 미술관이자 카페로 멋지게 재탄생해 있었다. 때가 탄 붉은 벽돌과 오래된 기계들이 예술품으로 탈바꿈한 공간을 보면서 묘한 감회와 함께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전시관 한쪽에서는 방문객들에게 옛 방직공장에서 생산되었던 면직물 헝겊 조각을 기념 소재로 나누어 주었다. 그 헝겊에 사람들은 각자의 말을 적어 옮겨 놓았다. 인터넷 공간에 쉽게 글을 담는 세상 대신에 사람들은 매직을 쥐고 천의 서걱거리는 질감을 느끼며 즉흥적으로 글을 적어 내려갔다.
고향 공간이 주는 감흥에 젖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소금>이라는 시를 한 편 지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남는 한 구절을 툭 던지듯 적어 내려간 글귀였다. 타인의 진심 어린 조언마저 뾰족한 욕심이나 상처 때문에 싱겁게 물리쳤던 것은 아닐까 하는 뒤늦은 고백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장롱 속에 옷들과 함께 갇혀 있던 이 헝겊을 마주한 순간, 가슴 한구석이 쿵 내려앉았다. 헝겊 조각은 그때에는 단순한 천 조각이나 지나간 낙서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그것은 오직 추억만이 가질 수 있는, 세상에서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하고 값진 '골동품' 같은 존재감으로 서 있었다.
이 소중한 추억을 그냥 이대로 다시 장롱 속에 묻어두기는 너무 아까웠다. 대단한 예술품은 아니더라도 번듯하게 액자에 넣어 내 방 벽에 걸어두고 두고두고 꺼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듯하게 다려진 이 손수건 만한 헝겊은 이제 내 방 한 편을 소박하게 채워줄 것이다. 8년 전 고향 땅에서 느꼈던 그날의 감정이 비로소 따뜻한 보금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돌아보면, 8년 전 그날 헝겊 조각 위에 지워지지 않을 기록을 새겼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글과 사진으로 남겨두는 행위도 본질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왕이면 더 많은 사람이 내 삶의 글을 읽어가고, 소중한 기억들을 더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오마이뉴스>는 물론이고 다양한 SNS 상에 부지런히 흔적을 남겨 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일상의 분주한 손길을 멈추고, 거친 종이나 천 위에, 혹은 나만의 소중한 온라인 공간에 진심이 담긴 글 한 줄을 남겨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장롱 속에서 혹은 잊고 지낸 기록 파일 속에서 그것과 예기치 못하게 다시 만날 때의 감동은 오직 손때 묻은 기록을 남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