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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문묘(일지총) 입구에 세워진 삼문 '무이문(無二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뜻을 담은 현판이 걸려 있어, 단종을 향한 성삼문의 변함없는 충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성삼문묘(일지총) 입구에 세워진 삼문 '무이문(無二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뜻을 담은 현판이 걸려 있어, 단종을 향한 성삼문의 변함없는 충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서준석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그리고 오늘날 논산이 500년 넘게 기억하고 있는 한 사람.

성삼문은 그렇게 역사와 문화유산 속에 함께 살아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흔적이 서울이 아닌 충남 논산에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성삼문의 일지총(一肢塚)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삼문의 묘'라고 부르지만, 정확히는 그의 한쪽 다리가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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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글을 만드는데 참여한 성삼문의 다리는 왜 논산에 남게 됐을까. 역사서는 그 물음에 명확한 답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논산에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있다.

성삼문이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된 뒤 거열형을 당했고, 시신 일부를 옮기던 지게꾼이 지금의 가야곡면 양촌리 고개를 넘고 있었다고 한다. 등에 멘 지게가 너무 무거워 길가에 내려놓고 쉬었다가 다시 지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지게를 그대로 둔 채 마을로 내려갔고, 다음 날 다시 올라와 보니 주변에는 호랑이 발자국만 가득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밤새 호랑이가 성삼문의 시신을 지켰다고 여겨 그 자리에 시신 일부를 묻었고, 이후 그 고개를 '성삼문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전승은 "힘들면 아무 데나 버려라"라는 소리가 들려 지게꾼이 시신 일부를 내려놓았고, 결국 그 자리가 묘가 됐다고도 한다. 오늘날 묘역 앞을 지나는 도로는 성삼문의 호를 따 '매죽헌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5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이름은 전설과 지명, 도로명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이다.

 잣나무 숲 사이로 이어진 박석길을 따라 관광객들이 성삼문묘(일지총)로 향하고 있다. 약 150m 이어지는 이 길은 묘역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자, 성삼문의 삶과 충절을 만나는 길이다.
잣나무 숲 사이로 이어진 박석길을 따라 관광객들이 성삼문묘(일지총)로 향하고 있다. 약 150m 이어지는 이 길은 묘역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자, 성삼문의 삶과 충절을 만나는 길이다. ⓒ 서준석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성삼문묘(일지총)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고요하다.박석이 깔린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면 양옆으로는 키 큰 잣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숲길 끝에 이르면 둥근 봉분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앞에는 두 기의 문인석이 묵묵히 묘역을 지키고 서 있다.
잣나무 숲을 지나며 가장 먼저 들린 것은 바람 소리였다. 적막은 이곳이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오랜 기억을 품은 장소임을 먼저 알려주었다.

봉분 앞에 서니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화려한 장식도, 웅장한 건축도 없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오히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자이자, 끝내 단종을 향한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성삼문의 삶을 더욱 또렷하게 떠올리게 한다. 이곳의 가치는 봉분 하나에만 머물지 않는다. 박석길과 잣나무 숲, 문인석,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사람들의 기억과 전승이 한데 어우러지며 일지총은 오늘도 성삼문의 삶과 절의를 전하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성삼문묘(일지총). 봉분 앞에 마주 선 두 기의 문인석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이자 사육신 성삼문의 묘역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성삼문묘(일지총). 봉분 앞에 마주 선 두 기의 문인석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이자 사육신 성삼문의 묘역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 서준석

성삼문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집현전 학사였다. 세종 20년(1438)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1447년 문과 중시에서 장원급제했다. '예기대문언독'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다. 새 문자의 음운 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명나라 음운학자 황찬을 찾아 요동을 열세 차례나 왕래했다는 일화는 그의 치열한 학문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삶을 역사에 더욱 깊이 새긴 것은 학문보다 충절이었다. 1453년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이 내린 정난공신 칭호를 사양했고, 끝내 단종을 임금으로 섬겼다.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면서 그는 노량진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서울 사육신묘역이 성삼문의 삶을 기억하는 공간이라면, 논산의 성산문묘(일지총)는 그의 절의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논산시 부적면 충곡2리 충곡서원 내삼문과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은 성삼문 유허비. 성삼문묘(일지총)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충곡서원은 성삼문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이어지는 곳이다. 내삼문을 지나면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충곡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일지총과 함께 논산을 대표하는 성삼문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논산시 부적면 충곡2리 충곡서원 내삼문과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은 성삼문 유허비. 성삼문묘(일지총)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충곡서원은 성삼문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이어지는 곳이다. 내삼문을 지나면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충곡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일지총과 함께 논산을 대표하는 성삼문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 서준석

논산에서 성삼문의 흔적은 일지총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인근 충곡서원에는 성삼문을 비롯해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의 위패가 함께 봉안돼 있다. 송시열이 글을 지은 성삼문 유허비도 이곳에 남아 있다.

묘역 입구의 하마비, 성삼문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부적면 충곡1리에 있는 은행나무, 외손자 암천처사 박증이 낚시를 즐겼다는 암천처사조대까지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특히 암천처사 박증은 집안이 화를 입은 뒤 논산으로 내려와 벼슬을 멀리하고 절의를 지키며 살았다. 그의 삶은 성삼문의 정신이 후손을 거쳐 지역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에 있는 암천처사조대. 성삼문의 외손자 암천처사 박증이 세속을 떠나 학문을 닦으며 지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은 바위 아래가 논이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노성천이 바위 곁을 흘렀던 것으로 추정되며, 바위에 새겨진 '암천처사조대' 글자는 후대의 문인 경암 윤동수가 그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성삼문묘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다.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에 있는 암천처사조대. 성삼문의 외손자 암천처사 박증이 세속을 떠나 학문을 닦으며 지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은 바위 아래가 논이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노성천이 바위 곁을 흘렀던 것으로 추정되며, 바위에 새겨진 '암천처사조대' 글자는 후대의 문인 경암 윤동수가 그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성삼문묘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다. ⓒ 서준석

성삼문묘(일지총)와 충곡서원, 유허비, 하마비, 암천처사조대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문화유산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후손을 거쳐 오늘의 논산까지 이어졌고, 그 시간을 지역 사람들이 함께 지켜오면서 하나의 성삼문 유적으로 남게 됐다.

논산은 흔히 관촉사 은진미륵과 돈암서원, 개태사, 명재고택, 강경 근대문화유산 등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가야곡의 성삼문 유적은 또 다른 논산의 얼굴을 보여준다.

한글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의 지성과 단종을 향한 충절, 그리고 그 정신을 500년 넘게 이어온 논산 사람들의 기억이 한 공간 안에서 지금도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논산시 가야곡면에 있는 작은 봉분 앞에 다시 서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성삼문묘(일지총) 앞에 세워진 묘표. 비석에는 '매죽당성선생지묘(梅竹堂成先生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묘표에는 '매죽당'으로 표기돼 있어 눈길을 끈다.
성삼문묘(일지총) 앞에 세워진 묘표. 비석에는 '매죽당성선생지묘(梅竹堂成先生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묘표에는 '매죽당'으로 표기돼 있어 눈길을 끈다. ⓒ 서준석

"한글을 만드는데 참여한 성삼문의 다리는 왜 논산에 남았을까?"

역사서는 왜 성삼문의 한쪽 다리가 논산에 남게 됐는지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논산 사람들은 지게꾼 이야기와 호랑이 전설을 전해왔고, 충곡서원에 위패를 모시며 해마다 묘제를 이어왔다. 그렇게 성삼문은 책 속의 인물이 아니라 논산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해 온 인물이 됐다.

그래서 성삼문묘(일지총)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이자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을 오늘까지 기억하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가야곡의 작은 봉분은 지금도 말없이 묻고 있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을 기억하는 마음은 얼마나 오래 남을 수 있는지를.

 논산시 부적면 충곡1리 마을회관 앞 언덕에 서 있는 은행나무. 성삼문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는 충곡서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으며, 일지총·충곡서원과 함께 성삼문의 삶과 충절을 기억하는 논산의 문화유산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논산시 부적면 충곡1리 마을회관 앞 언덕에 서 있는 은행나무. 성삼문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는 충곡서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으며, 일지총·충곡서원과 함께 성삼문의 삶과 충절을 기억하는 논산의 문화유산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 서준석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논산포커스에도 실립니다.


#성삼문#일지총#논산성삼문묘#논산시#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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