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희미한 여명과 함께 떠오른 초승달. 김병호(고중민) 선생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 속에서 양심의 소리를 따라 제복을 벗어 던지고 독립운동이라는 ‘새벽’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 이완우
지난달 하순, 천안 독립기념관을 견학하였다. 제6전시관(새로운 나라)에서 두툼한 한지로 묶은 '임시정부와 국내 국민과의 연계 더 알아보기'의 안내 서책을 넘겨보다가 〈장강일기〉(정정화, 학민사, 2014)를 알게 되었다. 이 책자에서 '고중민이라는 사람' 편을 읽고 고중민(1911~1958)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중경에 머물고 있던 정정화 여사는 남편이 새로 사귄 친구를 자주 만나는 것을 경계한다.
최근 국내에서 북경과 상해를 거쳐 중국 국민당의 지하조직을 통해 중경으로 온 고중민高仲民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얼굴이 준수하게 생겨 호감이 가는 편이긴 했으나, 첫인상이 무언가 꺼림직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중략) 고중민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았다. "뵐 면목이 없습니다. 사실은 제가 한때 왜놈 밑에서 형사노릇을 했었습니다."(〈장강일기〉 266~267쪽 내용)
고중민의 본명은 김병호(金炳豪)다. 그는 일제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에 관련된 어느 대학생을 연행하다가 양심에 따라서 풀어주고는 종로경찰서로 돌아가 "부주의로 놓쳤다"라고 허위 보고해 1940년대 초반에 해직당했다고 전해진다. 독립운동사 자료에 의하면 국내를 떠나기 약 1년 전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포스러운 존재, 일제 고등계 형사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들은 독립운동가,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이들은 '요시찰 인물' 명단을 작성하여 촘촘한 감시망을 운영했다. 독립운동에 연관된 학생들을 색출하기 위해 고등계 형사들은 강압적인 수사뿐만 아니라 고도의 심리전과 정보전을 펼쳤다.
형사들은 학생인 척 교복을 입거나, 청강생으로 등록하여 대학 강의실에 잠입했다. 교수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강의를 하는지, 학생들 사이에서 어떤 비밀 결사가 조직되는지 기록했다.
형사들은 고문이나 협박을 통해 약점을 잡은 학생을 회유하여 친구들을 밀고하게 유도하기도 했다. 형사들은 민족의식이 강한 학생들의 하숙집에 자주 들이닥쳤다. 책상 위에 놓인 금서(禁書), 독립운동 관련 유인물, 일기장이나 편지를 찾아내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고중민은 고등계 형사 중에서 독립운동 혐의를 받는 대학생을 추적하는 상황에서 인간적인 양심을 지키려 했다고 한다.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독립운동 관련 서적이 든 상자를 못 본 듯이 지나치거나, 다른 방에 숨겨둔 물건을 발견하고도 "여기엔 아무것도 없군"이라며 문을 닫아버렸다. 상부에 제출할 보고서에는 "혐의점 찾을 수 없음"이라고 기록하였다고 전한다.
일제 고등계 형사 고중민의 전향과 독립운동
일제 고등계 형사에서 해직된 고중민은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를 찾아갔다. 중국 국민당 지하조직 남의사(藍衣社)의 협조로 그는 베이징에서 난징을 거쳐 충칭(중경)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1943년 상반기, 고중민은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중경을 떠나 중국 국민당의 지하연락망을 통해 남경으로 갔다. 그는 남경중앙대학 유학생들을 포섭하여 광복군에 입대시키기 위한 공작을 하였다. 당시 남경은 일제 치하의 남경정부가 들어서 있어서, 유학생 포섭 공작은 목숨을 걸고 하는 활동이었다.
송지영이 동아일보 등의 기자로 있다가 난징 중앙대학에 유학할 때였다.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때 고중민에게 처음으로 포섭된 송지영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그 외진 절간에 기숙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처음 그가 자기의 내력을 밝혔을 때 나는 적지 않아 놀랐으나 한 편 반갑기 한량없었다.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고 나왔노라는 한 마디에 나는 놀라면서도 가슴은 몹시 설레었다. (중략) 그 자신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국내로 들어가는 길이니 나더러 상하이, 난징지구의 공작 임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송지영의 〈나의 유수기(옥중기)〉의 내용 일부)
그러나 1943년 6월 중순 무렵, 일본 헌병이 유학생 포섭 공작의 정보를 포착하였고, 유학생 다수가 일본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일본인 교수 한 명이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서자, 수감되었던 학생들 대부분은 석방되었다. 이때 석방된 유학생들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고중민과 유학생 송지영은 유죄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투옥되어 해방을 맞아 출소한다.
꺼지지 않을 불꽃, 김병호 추모가
한 유튜브 방송에 '종로의 깊은 밤, 억압의 제복을 벗어 던지고'로 시작하는 '아, 김병호'의 추모가가 있다. 이 추모가 가사를 바탕으로 '전향, 독립운동, 옥고, 비극적 결말'의 단계로 김병호의 서사를 서술해 보았다.
그는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탄압하며 동족에게 총구를 겨누는 위치에서,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서 일제의 지위를 버리고 독립을 향한 역사의 가시밭길을 택했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충칭과 난징을 오가며 조국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과 조국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
항일 투쟁의 과정에서 그는 일제에 체포되었다. 나가사키 형무소에서도 그는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았고, 해방의 순간까지 고문과 억압을 견뎌냈다.
광복을 맞이했으나, 그에게 평화는 짧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다시금 '권력의 어둠'에 갇히게 되었다.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 사건은 조작된 사건으로 알려졌다. 끝내 대구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역사는 오랫동안 그의 희생을 가리고 잊게 하였다. 정부의 독립운동가 서훈에서도 일제 고등계 형사의 전력은 주홍 글씨가 되었다. 이제 김병호 선생은 역사의 바람 속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로, '꺼지지 않을 불꽃'으로 기억될 것이다.
김병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근현대사에서 격동적인 삶을 살았다. 형사 출신이라는 이력을 벗어버리고, 그가 선택했던 결단과 그로 인해 치러야 했던 희생을 제대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기록 속에 묻혀 있던 '김병호'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길이다.

▲녹색 잎 사이로 만개한 분홍 난초. 김병호(고중민) 선생은 일제 형무소의 옥고를 이겨내고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시대의 비극으로 잊혔다. 그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은 역사의 뜰에 다시 피어나 기억되어야 한다. ⓒ 이완우
덧붙이는 글 |
1. ‘아, 김병호’ 추모가 해설은 유튜브 ‘한족동맹’의 영상을 참고하였습니다.
2. 기사 하단에 첨부한 난초는, 36년 전 지인에게 선물 받아서 기자가 지금까지 정성껏 키워온 반려 식물입니다. 긴 시간 모진 풍파를 견디며 고결하게 피어난 선생의 삶을 닮은 생명력으로 헌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