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송팔대가의 한 분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시인은 글을 잘 쓰려면 삼다(三多). 곧 '다독'(多讀, 많이 읽어라), '다작'(多作, 많이 쓰고 지어라), '다상량'(多商量, 많이 생각하라)을 강조하셨다. 1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금언으로 새겨진다. 그리하여 나는 이 가르침을 평소에도 늘 실천하고 있다. 그뿐아니라 현직 때, 작문 교과 지도 첫 시간이면 이 세 낱말을 칠판에 크게 판서한 뒤, 하나 하나 실례를 들어가며 한 시간 동안 수업하곤 하였다.
오늘같이 더운 날은 글을 쓰기보다는 작품 자료로 다른 이가 쓴 글을 읽는 게 좋다. 나는 요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숙군과정에서 유일하게 살아난 그 연유를 알고자 오래전에 읽은 백선엽 장군의 자서전 <군과 나>를 다시 정독하고 있다. 그러면서 참 세상은 ’넓은 것 같지만 매우 좁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1980년대 초 나는 백 장군의 아드님(백남홍)을 이대부고에서 직접 가르친 바 있었고, 그 어머니로부터 밥 한 끼도 대접 받은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다. 아무튼, 인간관계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란 시구처럼,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내 인생 80 평생 가운데, 학창 시절을 제외한 50 여 년 중, 40년 가까이 공직 생활을 했다. 1969년 2월 20일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곧장 광주 보병학교인 상무대에 입교하여 2004년 2월 29일 이대부고 교단에서 명예 퇴직했다. 그때까지 만난 여러 소대원, 그리고 제자 가운데, 이색 인연으로 만난 일화를 몇 회 나눠 연재한다.

▲LA 이대부고 사은 모임LA 용수산 한식집에서 {뒷열 왼쪽부터 정종옥, 강영수, 전영록, 김재훈 앞열 김순세 선생님, 박도) ⓒ 박도
2004년 1월 31일 오전 7시 긴 전화 벨 소리에 잠이 깼다. LA의 미주 한국일보 진천규(전 한겨레신문) 기자로 나의 출국을 확인하는 전화였다. 그는 1971학년도 서울 오산중학교 1학년 12반의 담임 반 학생이었다. 그날 그는 도착 시각에 맞춰 공항에 나오겠다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LA 공항LA 공항 대기실에서 오른쪽부터 권중희, 진천규, 박도 ⓒ 박도
그날 오후 1시 30분 LA 공항에 닿자 '꺽다리' 그가 대기실에서 손을 번쩍 쳐 들며 "선생님!" 하고 불렀다. 그때 나와 동행한 권중희 선생도 미국 방문이 처음이라 서울에서 간 두 노인은 얼떨떨했다. 하지만 그날 그의 안내로 LA 시내 관광을 잘하고, 귀국 때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때 나와 권 선생은 오마이뉴스 독자들의 성금으로 '백범 암살 진상'을 밝히고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가는 길에 한 독자(김명원 씨)의 항공표 후원으로 NARA에 오가며 LA를 경유케 됐다. 그해 3월 12일, 귀국 길에 다시 LA에 들르자 재미 동포들의 환영이 대단했다. 그 이튿날은 이대부고 강영수 제자가 LA 시내 한 한식 집(용수산)으로 점심 초대를 했다.
그날 강 회장은 내가 가르친 바 있는 LA 거주 이대부고 제자는 다섯인데, 모두에게 연락하자 참석하겠다고 하였단다. 하지만 한 제자(안우경)만은 아마도 불참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잘 알았네"라고 대답하고, 곧 입을 닫았다. 그도 더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안우경)를 1978학년도 이대부고 1-2반에서 담임 교사로 만났다. 그는 대단히 공부를 잘했고, 매우 영리하고 야무진 학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연세대 안세희 총장님이셨고, 그의 큰아버지는 그 무렵 나와 권중희 선생이 그분 행적을 뒤쫓았던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였다.
내가 그를 담임 하는 중, 어느 날 그가 손 편지를 써서 나의 교재 사이에 끼워 넣어 주었다. 그때 그 문안 전문은 다 기억되지 않는데, "선생님은 교실의 해입니다. 햇볕은 모든 생물에게 골고루 빛을 줍니다."라는 문장 만은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날 나는 그 편지를 읽고 한동안 깊은 충격에 빠졌다. 그 문안은 그날 이후, 나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들었다.
후일 졸업생 중, 아버지가 전국경제인연합회장님이요, 어머니가 이대 김세영 교수였던 아드님(김양우)이 강원 산골 안흥 내 집으로 일부러 찾아와 남긴 말이다.
"선생님은 학생을 편애하지 않으셨습니다."
LA에 살았던 그가 왜 옛 담임을 보고 싶지 않았으랴. 하지만 그날 그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다른 까닭이 있었을 거다.
그로부터 그새 20여 년이 지난 이제는 피차 이생에서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서로 현대사의 아픈 상처로 '사제의 순수한 정에 아픈 점을 찍지 말자'고 옛 훈장이 안우경 님에게 극진한 호소를 드립니다.

▲재미 동포 환영회LA 재미 동포 환영회 ⓒ 박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도 페북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