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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화실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그림은 골목에서 시작되고, 어떤 그림은 파도와 바람 속에서 빚어진다. 울릉도 서면 평리마을, 바닷바람이 하루 종일 벽을 스치는 작은 마을에서 한 남자가 묵묵히 붓을 움직이고 있다. 흰 벽 위에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독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화정 김동식(69) 화백. 그는 화실보다 마을 담벼락을, 캔버스보다 콘크리트 벽을 선택한 화가다. 전시회보다 골목길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났고, 작품을 파는 대신 웃음을 그려 넣었다. 그의 그림은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선물이었다.

 울릉도의 낡은 담벼락에 생명을 불어넣는 화가. 그의 붓끝은 섬의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새로운 풍경을 그려낸다.
울릉도의 낡은 담벼락에 생명을 불어넣는 화가. 그의 붓끝은 섬의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새로운 풍경을 그려낸다. ⓒ 김동식

섬이 들려준 첫 번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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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울릉도를 봤을 때 섬 전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바다와 절벽, 숲과 바람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죠."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울릉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울릉도가 자신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늘 울릉도가 등장한다. 독도와 괭이갈매기, 동백꽃과 흑염소. 모두 울릉도를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이자 섬의 미래를 향한 소망이다.

 독도의 동도와 서도를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 두 섬의 웅장한 풍경에 우리 바다의 역사와 생명을 함께 그려 넣고 있다.
독도의 동도와 서도를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 두 섬의 웅장한 풍경에 우리 바다의 역사와 생명을 함께 그려 넣고 있다. ⓒ 김동식
 울릉도의 푸른 산자락에서 풀을 뜯는 흑염소.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섬의 일상을 담고 있다.
울릉도의 푸른 산자락에서 풀을 뜯는 흑염소.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섬의 일상을 담고 있다. ⓒ 김동식

마음으로 그린 풍경

그의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그에게 자연은 정복하거나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벗이며 삶을 일깨워 주는 스승이다. 울릉도의 바다는 생명을 품은 터전이고, 숲은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과도 같다. 그래서 그의 벽화 속 자연은 거칠기보다 포근하고, 낯설기보다 친근하다.

"울릉도의 바다와 산은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그의 작품은 화실에서의 상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산길을 걷고 바다에 몸을 맡기며 자연과 함께한 시간이 그림의 밑바탕이 된다. 바위를 마주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하고, 소나무에서는 세월의 이야기를 듣는다. 물속에서는 물고기의 움직임과 해조류의 흔들림까지 하나의 언어처럼 받아들인다. 자연은 그에게 풍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살아 있는 존재다.

 울릉도의 자연은 그에게 풍경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내는 예술의 원천이다.
울릉도의 자연은 그에게 풍경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내는 예술의 원천이다. ⓒ 김동식

풍경보다 마음을 그리다

이러한 감성은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독특하게 만든다. 실제 울릉도의 풍경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감하는 따뜻한 상상력이 더해진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현실을 벗어난 환상이 아니다. 오랜 세월 자연과 함께 살아오며 마음속에 쌓인 기억과 감정을 화폭에 옮긴 결과다. 익숙한 풍경은 그의 붓끝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관람객은 벽화 앞에서 잠시 일상을 잊은 채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평온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보이는 것만 그리면 사진과 다를 게 없잖아요. 저는 눈으로 본 풍경보다 마음으로 본 풍경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그의 예술 철학이 담겨 있다.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며 느낀 감정과 생명을 담아내는 것, 그것이 그가 붓을 드는 이유이며 그의 그림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머무는 이유다.

 울릉도의 풍경을 벽화로 되살리는 주인공. 그의 붓끝에서 섬의 바다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울릉도의 풍경을 벽화로 되살리는 주인공. 그의 붓끝에서 섬의 바다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 진재중

붓끝에 담긴 한평생의 철학

벽화를 그리는 방식 또한 남다르다. 대부분의 벽화가들은 아크릴이나 페인트를 사용하는데, 그는 수묵담채 기법을 고집한다. 먹의 농담과 은은한 채색으로 표현하는 동양화 기법이다. 수묵담채는 수정이 어렵다. 한 번 붓을 대면 되돌리기 어렵고, 벽면 상태에 따라 결과도 달라진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점이 좋다고 말한다.

"붓질 하나에도 책임이 생기거든요. 긴장감이 있어야 그림도 살아납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자신만의 기술은 보는 이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다만 오랜 시간 연구하고 실패를 반복하며 얻어낸 결과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동해의 첫 햇살이 울릉도를 깨우는 순간을 화폭에 담은 작품. 여명 속에서 피어나는 섬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붓끝으로 표현했다.
동해의 첫 햇살이 울릉도를 깨우는 순간을 화폭에 담은 작품. 여명 속에서 피어나는 섬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붓끝으로 표현했다. ⓒ 김동식

담벼락에서 시작된 두 번째 인생

서울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젊은 시절 도시에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서울과 영덕에서 화가와 라이브 가수로 활동했던 그는 태풍으로 삶의 기반을 잃은 뒤 울릉도에 정착했다.

허름하고 낡은 집이 늘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그는 집 안팎을 직접 페인트로 칠하고 밋밋한 벽면에 푸른 바다 풍경을 그려 넣었다. 그저 집을 조금 더 밝고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던 작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우연한 시작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벽화 인생에는 한 사람의 작은 제안에서 시작된 특별한 일화가 있다. 그곳을 지나던 당시 파출소장이 벽화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한동안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화가에게 물었다.

"이런 그림은 돈을 받고 그려주는 겁니까?"

화가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무료로 그렸습니다."

뜻밖의 답변에 감동한 파출소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특별한 제안을 건넸다.

"그렇다면 마을 담벼락에도 그림을 그려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을 담벼락에 그림을 그린 뒤 한쪽에 자신의 연락처를 남겨 두었다. 이것이 울릉도 벽화의 시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민들의 연락이 하나둘 이어졌다.

"우리 집 담벼락에도 그림을 그려 달라." 그렇게 한 점의 벽화는 또 다른 벽화를 불러왔고, 그의 붓끝은 울릉도의 골목과 마을 곳곳에 섬의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는 벽화를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지역사회와 나누는 '재능기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건비는 받지 않고 최소한의 재료비만 받으며 마을 골목과 공공기관, 담벼락 곳곳에 그림을 그려 나갔다. 삭막했던 회색 벽은 푸른 바다와 꽃,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따뜻한 공간으로 변해갔고, 주민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우연히 시작한 한 점의 그림은 그의 예술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벽화를 통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게 된 그는, 울릉도와 더욱 깊은 인연을 맺으며 결국 삶의 방향까지 바꾸게 되었다.

 울릉도의 담벼락을 캔버스로 삼아 독도와 바다, 섬의 자연을 그려내는 화백. 그의 벽화는 울릉도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담은 살아 있는 예술이 되고 있다.
울릉도의 담벼락을 캔버스로 삼아 독도와 바다, 섬의 자연을 그려내는 화백. 그의 벽화는 울릉도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담은 살아 있는 예술이 되고 있다. ⓒ 김동식

자연이 화폭이 되고 삶이 작품이 되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날이면 그는 산과 바다로 향한다. 바다가 잔잔한 날에는 직접 물질을 하며 홍합과 전복을 채취하고, 봄이면 산에 올라 제철 나물을 캔다. 생계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또 다른 창작의 과정이다.

울릉도의 바다와 산은 그에게 가장 큰 화실이자 스승이다. 바다 위로 번지는 햇살, 파도가 바위에 남긴 흔적, 계절마다 달라지는 숲의 색은 그의 눈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어느 순간 벽화와 화폭 속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의 그림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함께 살아온 시간, 섬과 교감하며 얻은 감성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그는 직접 채취한 해산물을 지역 음식점에 납품하며 소박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붓을 내려놓은 순간에도 그의 예술은 멈추지 않는다. 자연을 바라보고 느끼는 모든 시간이 곧 그의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제게 가장 훌륭한 스승입니다. 바다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떤 색을 써야 하는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저절로 떠오릅니다. 저는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붓을 내려놓은 날에도 그는 바다로 향한다. 해삼과 전복을 채취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곧 그의 그림을 키우는 영감이 된다.
붓을 내려놓은 날에도 그는 바다로 향한다. 해삼과 전복을 채취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곧 그의 그림을 키우는 영감이 된다. ⓒ 김동식

오늘도 붓을 싣고 달린다

"좋은 그림은 벽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벽화 한 점을 보며 누군가 미소 짓는다면, 그것으로 제 그림은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오늘도 그는 붓과 그림 도구를 오토바이에 싣고 섬길을 달린다. 벽화를 기다리는 마을이 있고 그림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손을 내밀면 그는 망설임 없이 붓을 든다.

그의 화폭은 화실을 벗어난 지 오래다. 골목길 담벼락, 낡은 건물 외벽, 조용한 어촌마을이 그의 캔버스가 되었다. 회색빛 벽에 색을 입히는 일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아니다.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주민들의 일상에 작은 웃음을 선물하는 일이다.

울릉도에 정착한 지 13년. 이 섬은 그에게 화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도시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면, 울릉도에서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마을의 기억과 삶을 화폭에 담는 화가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벽화는 미술 작품을 넘어선다. 담벼락에는 섬의 풍경이, 그림 속에는 주민들의 삶과 추억이 스며 있다. 그의 붓끝은 벽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울릉도는 그의 그림이 시작되는 영감의 공간이자 삶을 이어가는 터전이다. 섬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 작품 속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울릉도는 그의 그림이 시작되는 영감의 공간이자 삶을 이어가는 터전이다. 섬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 작품 속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 울릉군

화폭과 무대를 오가는 예술가

"노래는 제 삶의 일부입니다. 낮 동안의 수고를 위로하고, 하루를 노래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에게 음악은 취미를 넘어 삶의 리듬이다. 해가 서쪽 바다 너머로 기울면 화가는 붓을 내려놓고 통기타를 든다. 화실을 나선 그는 울릉도의 밤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호흡하며 또 다른 예술을 펼친다. 취미로 시작한 라이브 공연은 어느덧 25년이 넘었다. 그의 노래는 울릉도를 찾은 여행객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고, 섬사람들에게는 하루의 피로를 달래주는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이제 그의 공연은 울릉도의 밤을 수놓는 또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그에게 그림과 음악은 서로 다른 예술이 아니다.

"노래는 귀로 그리는 그림이고, 그림은 눈으로 듣는 음악입니다."

그의 말처럼 화폭과 무대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낮에는 붓으로 울릉도의 풍경과 사람을 그리고, 밤에는 노래로 울릉도의 바람과 파도,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들려준다.

 붓과 기타를 벗 삼아 울릉도의 삶을 표현하는 화가. 그의 그림과 음악은 섬이 가진 따뜻한 기억을 전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붓과 기타를 벗 삼아 울릉도의 삶을 표현하는 화가. 그의 그림과 음악은 섬이 가진 따뜻한 기억을 전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 김동식

"벽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잠시라도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에게 벽화는 예술을 뽐내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에 작은 행복을 더하는 선물이다.
세월이 흐르면 벽화의 색은 바래고 담벼락도 낡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리며 사람들과 나누었던 따뜻한 마음만큼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만약 백 년 뒤 누군가 그의 벽화 앞에 발걸음을 멈춘다면, 그는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말했다.

"이 섬을 사랑해 주세요. 제가 사랑했던 것처럼."

짧은 한마디에는 울릉도와 함께 살아온 13년의 시간, 사람을 향한 애정, 그리고 예술을 통해 섬을 사랑해 온 한 화가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화정 김동식 화가. 그는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릉도라는 이름과 그 섬을 향한 사랑을 한 붓 한 붓 새겨 넣는 화가로 살아가고 있다.

 울릉도는 그의 삶의 터전이자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다. 섬의 바다와 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화폭 속에서 새로운 풍경으로 태어난다.
울릉도는 그의 삶의 터전이자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다. 섬의 바다와 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화폭 속에서 새로운 풍경으로 태어난다. ⓒ 울릉군



#울릉도#100인100색#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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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재중의 '100인, 100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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