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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사선대 농원 마을, 마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 과수원과 주택이 함께 어울려 있다. ⓒ 이완우
섬진강의 상류인 오원강(烏院江)이 굽이치는 임실 관촌면, 그 강물 건너편 사선대 관광지의 절벽 넘어 건너편 산비탈에는 6.25 전쟁 후 실향민들이 터를 잡고 일군 '농원 마을'이 있다. 지난 13일, 임실 관촌면 덕천리 농원 마을에서 박철수(92세) 할아버지를 만났다.
앞서 지난 2일에는 임실 관촌면 문화마을에서 6.25 전쟁 실향민인 김순전(90세) 할머니의 임실 마당재의 개척 이야기를 듣고, 전쟁 실향민의 정착과 자립의 역사를 채록한 바 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립을 일궈낸 할머니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관련 기사:
바다 건너온 14살 소녀, 그 땅을 지키는 아들). 당시 할머니의 아들 김창호(72세)씨가 귀띔했다. "이웃 마을에 박철수 할아버지가 계십니다"라고. 그렇게 '실향민의 역사'를 찾는 여정은 또 다른 증언자를 향해 계속되었다.
어두운 밤, 배에 몸을 실은 16살 소년
박철수 할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하여 걷기 힘들었고, 청력이 약해져 대화에 집중해야 했다. 아래는 할아버지가 피난과 정착의 과정을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1950년 여름 어느 날, 16살의 소년은 어두운 밤을 틈타서 피난민들과 함께 배에 몸을 실었다. 서해안 옹진반도의 어느 작은 포구를 떠나서 연평도에 도착했다. 학교 교실에서 얼마를 지냈다. 미군들이 큰 배에 타라고 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배에 탔다. 군산항에서 머물렀다. 열차를 타고 임실에 도착하였고, 각 마을로 피난민들을 배당하였다. 임실역에서 임실읍 신안리로 갔다. 그곳에서 얼마를 살다가, 임실읍 성가리의 압골 마을로 옮겼다. 마지막에 정착한 곳이 임실 관촌면 덕천리 사선대 산비탈이었다.
산비탈에 움막처럼 살 곳을 마련하고, 우선 할 게 없으니 날품으로 일을 다녔다. 강냉이 가루가 자주 배급으로 나와서 요긴한 먹거리가 되었다. 지덕(땅의 형세) 사나운 땅을 억척스레 파내서 밭을 일구며 일했다. 조금씩 형편이 나아져서, 돈도 조금 모이고 땅도 논도 작으나마 살 수 있었다. 24살에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갔다. 의정부에서 36개월, 아니 36개월 4일 하고, 제대했다. 결혼은 임실읍 향교 마을에 사는 이와 중매로 결혼하였다. 일을 더 열심히 했다. 날품 일 다니고, 모도 심으러 다녔다. 비탈밭을 일궈서 배와 복숭아를 심었다. 이곳 산비탈(깔크막)이 심해서 길이 좋지 못해, 농기계도 못 들어가고, 과수원 일이 힘들었다.
말씀하시던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아, 저기 내 과수원입니다."
오래 전에, 고향 생각이 나서 언젠가 한 번 고향 가까운 데까지 가보았다. 바다 건너 희미하게 보이는 데가 옹진 땅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고향 땅을 그리워하여 고향과 가까운 곳의 전망대를 찾은 때가 언제인지, 어느 장소로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봄이면 사선대 절벽 능선에 가침박달과 산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는데, 할아버지에게 그 풍경은 지난 70여 년 평생을 버티게 한 동력이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농원 마을의 주택들 주위로 펼쳐진 과수원의 나무들은 여름 장마철의 바람에 푸른 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 농원 마을에 한 때는 실향민 50여 가구가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점차 세월이 가면서 도시로 타지로 떠나고, 실향민은 현재 다섯 가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주택도 많이 개량되어 좋아졌다. 그러나 1960년대에 지었던 흙벽돌집이 두 채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고 하였다.
한국전쟁 후 실향민들은 판자와 천막을 덧댄 판자촌이나 움집 형태의 임시 거처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목재로 일자형 네 칸의 난민용 주택을 지어서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구호용 주택은 난방 등 충분하지는 않았다.
생존의 기록, 흙벽돌집

▲사선대 농원 마을의 인적이 끊긴 흙벽돌집 왼편, 옆에 흙벽돌집 벽체와 독립된 시멘트 블록 굴뚝이 보인다. 화재 예방 및 안전성 확보, 난방 효율 증대(연기 배출 원활), 구조적 보수와 관리의 용이성을 목적으로 한 듯하다. ⓒ 이완우

▲사선대 농원 마을의 인적이 끊긴 흙벽돌집 중앙 부분, 흙벽돌집 벽체에 보이는 주름관(은색 금속관). 이 시설은 난방 방식이 연탄보일러 등으로 바뀌면서 별도로 설치한 연통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아궁이에서 더 편리한 난방 방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간직하고 있다. ⓒ 이완우
이곳 임실의 사선대 산비탈의 농원 마을에서는 1960년대에 황토 벽돌을 찍어서 집을 지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 형태의 울력 협동 작업으로 참여하였다. 대체로 이전의 목재 일자형 주택을 기본 틀로 하여 황토 벽돌을 찍어서 벽체를 대었다. 지붕은 볏짚으로 이어 초가집을 이루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사선대 농원 마을 실향민들은 논(농토)이 없으니 몇십 가구가 지붕을 이을 짚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임실 마당재 농장 김창호씨 증언에 의하면 '집집마다 산에 가서 억새를 베어다가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깊은 산촌에 나타나는 억새집(샛집)이 농원 마을에 등장하였다. 초가지붕(볏짚)은 썩기 쉬워 매년 새로 지붕을 이어야 하지만, 억새는 튼튼하여 샛집은 지붕만 잘 이으면 40~50년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
농원 마을에서 억새로 지붕을 이었던 것은 볏짚을 구하기 어려워 선택한 방식이었지만, 일반 초가(볏짚) 지붕의 구조(물매)에 억새로 이었기에 비가 샐 수밖에 없었다. 농원 마을 흙벽돌집의 견고하지 않은 벽체와 지붕 구조의 급한 경사로 지붕을 높게 하여 억새를 충분히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흙벽돌집 벽체와 독립된 시멘트 블록 굴뚝이 보였다. 화재 예방 및 안전성 확보, 난방 효율 증대(연기 배출 원활), 구조적 보수와 관리의 용이성을 목적으로 한 듯하다. 흙벽돌집 벽체에 보이는 주름관(은색 금속관). 이 시설은 난방 방식이 연탄보일러 등으로 바뀌면서 별도로 설치한 연통으로 보였다. 전통적인 아궁이에서 더 편리한 난방 방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선대 농원 마을의 인적이 끊긴 흙벽돌집, 흙벽돌 벽체, 서까래, 덧댄 서까래, 슬레이트, 칼라강판이 보인다. ⓒ 이완우
흙벽돌집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하였다.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자 농원 마을에서도,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어 이었다. 이 마을에 남아 있는 흙벽돌집은 서까래를 덧대어 길게 하고 슬레이트를 이은 것을 볼 수 있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 다시 칼라 강판을 이었다.
흙벽돌집의 토대, 슬레이트 지붕, 그 위에 덧씌워진 칼라 강판. 이 세 층위는 세월의 더께와 실향민 정착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농원 마을에 남은 이 두 채의 흙벽돌집은 70년 전, 맨손으로 산비탈 거친 땅에 뿌리 내리려 했던 실향민들의 생존의 기록으로 보였다.
흙벽돌집 지붕 위로 세월이 덧입혀졌듯,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92년의 주름이 겹겹이 쌓였다. 평생 비탈진 땅을 일구며 정직하게 살아온 산골 농부 할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고향 옹진의 바다를 가슴에 품고 임실의 산비탈에 뿌리내린 할아버지의 평생은 현대사의 격동기 시련을 이겨낸 실향민의 진솔한 표상이었다.

▲임실 사선대 농원 마을 아래 임실-진안 간 지방도와 과수원 풍경 ⓒ 이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