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창 회문산, 비목공원 위령탑 ⓒ 이완우
지난 17일, 교실 밖의 길동무 여행을 순창 회문산으로 떠났다. 앞서 지난 8일, 남원 용담사와 구룡계곡으로 길동무 사제동행 여행을 갔었다. (관련 기사 :
인생을 보상 받은 기분입니다)
여행 길동무들은 섬진강 천담 마을을 지나서 순창 구림면 회문산의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회문산자연휴양림에 도착하였다. 이곳 휴양림의 비목공원에 6·25 양민희생위령탑과 회문산 역사관(구 빨치산 전시관)이 있다.
회문산의 무성한 숲속 비목(碑木) 공원에 '6·25양민희생위령탑'이 높이 서 있었다. 대한민국과 유엔, 6·25 참전 16개국의 깃발이 게양되어 이 공원을 지키고 있다.
매년 6월 25일에 순창군과 회문산 제전위원회에서 이곳에서 추모식을 올린다. '해원, 화합과 통일 기원 제21회 회문산 해원제'와 '조국을 위하여 바친 넋이여 고이 잠드소서!'의 추모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시비(詩碑)에 '어쩌다가 이 산하 허리가 동강 났는가' 글귀로 시작하는 '외로운 혼백을 위하여'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위령탑은 이 산하에서 벌어진 비극을 증언한다. 당시 이 땅에서 벌어진 빨치산 활동은 거대한 이념의 충돌 속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빨치산의 무장 투쟁과 군경의 토벌이라는 두 갈래 아래 희생되었다. 우리가 마주한 이 위령탑은 대립의 시대에 이름 없이 쓰러져 간 모든 무고한 생명을 기억하기 위한 약속이다.
위령탑 앞에는 여러 그루의 무궁화나무가 짙은 녹색 잎을 배경으로 무궁화 꽃이 피었다. 꽃잎의 색깔이 흰색이면서 꽃 중심부에 붉고 선명한 단심이 뚜렷한 백단심계 무궁화꽃이 인상 깊게 보였다.

▲순창 회문산, 비목공원 위령탑 앞 무궁화꽃 ⓒ 이완우

▲순창 회문산, 비목의 숲에 있는 비목(碑木) ⓒ 이완우
울창한 편백 숲속 오솔길을 걸어서 '회문산 비목의 숲'을 찾아갔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비목이 서 있고, 그 위에 얹힌 철모 하나. 6·25 전쟁 당시 격전지였고, 수많은 희생이 서린 아픈 역사를 노래하는 '비목' 노래 가사가 하얀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길동무 여행자 한 명이 비석을 한참 쳐다보다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하며 천천히 노래를 불렀다. '비목' 노래의 선율이 푸르고 푸른 숲속으로 퍼져 나갔다.

▲순창 회문산, 역사관 ⓒ 이완우
회문산 역사관 앞에 서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회문산 정상까지 2.1km의 지점으로 회문산의 깊숙한 곳이다. 견고하게 다듬어진 석재 외벽과 현대적인 유리창이 회문산의 자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회문산 역사관에는 회문산의 풍수지리설, 항일의병활동, 갱정유도교의 발상지, 회문산의 천주교 성지 등의 역사적 사실이 전시되어 있다.
회문산 역사관이 자리한 장소는 한국전쟁 시기에 회문산 빨치산 부대 사령부의 터로 알려진 역사적인 공간이다. 회문산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활동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다. 그 역사는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수·순천의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지리산과 회문산 등지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시기 1950년 9·28 수복을 전후하여, 퇴각하던 인민군 낙오병과 남로당 전북도당 세력이 회문산 일대에 집결하며 유격대를 조직했다. 당시 전북도당은 회문산 장군봉 아래 대수말에 사령부를 두고 활동하였다.
1951년 8월 무렵 회문산의 빨치산이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독립 제4지대)'에 편입되었다. 이후 회문산의 빨치산 세력은 지리산 등지로 이동하거나 토벌 작전으로 인해 비극적인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회문산 만일사, 범종각 옆 큼직한 바위틈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 ⓒ 이완우
회문산 휴양림의 아래 산기슭 계곡에 있는 만일사를 찾았다. 만일사는 7세기 중엽의 백제 무왕 시기에 창건된 천년 사찰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때 사찰이 소실되었고, 몇 년 후에 재건되었다. 만일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 사찰이다.
이성계가 회문산의 이 사찰에 머물며 국태민안을 기원했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대업을 예언하며 이곳에서 만일(萬日)을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전승된다.
회문산 만일사 도량, 범종각 옆 큼직한 바위 위에서 꽃 한 송이가 피었다. 20cm 크기의 꽃식물이 멀리 있는 대웅전과 규모만큼 겹쳐 보였다. 바위틈을 찾아서 뿌리를 내리고 한 송이 꽃을 피운 생명력은 마치 이 산에서 저물어 간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는 헌화(獻花) 같았다. 이 꽃은 매일 새로운 꽃을 피운다는 일일초(日日草)인데, 만일(약 27년) 동안 기도했다는 만일사(萬日寺)와 잘 어울렸다. 만일을 기도하여도 날마다 새로운 마음과 정성의 기도였을 것이다.

▲회문산 만일사 대웅전 ⓒ 이완우
만일사는 순창 고추장의 시원지라는 설화가 전승된다. 이성계가 이곳에 머물 때, 민가에서 고추장을 올렸다. 왕이 된 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순창 고추장을 진상하게 했다고 한다.
고추는 임진왜란 무렵에 전래된 작물로 알려졌다. 산초(山椒)나 후추(胡椒, 후초)와 같은 매운맛 향신료로 만든 '초장(椒醬)'이 예로부터 있었다고 한다. 매운 음식을 즐기던 전통 식문화가 이 지역의 특산물로 발전해 온 과정을 만일사 설화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이해된다.
회문산이 가진 '은둔과 저항의 역사'를 말해주는 조선 후기의 사료가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긍익, 1776년)에 기술된 내용으로 '한국고전종합DB, 연려실기술 제17권/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에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 있다.
갑오년 여름에 토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천명 만명으로 떼를 지었다. (중략) 남원 등 일곱 고을 군사가 협력하여 회문산(回文山)에 모여 있는 도적을 잡는데,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찍어내고 사면으로 공격하여 포위하니, 도적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높은 곳에 오르기도 하고 험한 곳에 웅거하기도 하였으나, 연일 굶주리고 피곤하여 능히 싸우지 못하였다. 관군이 밤을 타서 백여 명을 잡아 죽이니 회문산 길이 비로소 소통되었다.
임진왜란 침략의 2년 뒤인 갑오(1594)년은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교섭이 진행되던 때였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전란 중에 가렴주구와 사회 질서 혼란으로 생계를 잃은 유민들의 무리를 조정에서는 '토적(土賊, 지방의 도적)'으로 규정하고 토벌하였다.
1594년 회문산 도적 사건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회문산은 지형이 험준하여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이자 은거지로 활용되었다. 관군이 진입하기 어려운 험지였기 때문에, 관군은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찍어내어' 길을 만들고 포위하는 방식의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회문산이 시대의 변곡점마다 저항과 갈등이 존재했던 역사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1894년, 동학혁명에 참여한 동학군의 소수가 우금치 전투 이후 회문산에서 몇 년을 은거하고, 이후 천도교인으로 삼일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회문산은 대한제국 시대에 의병들의 활발한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향토 읍지인 순창군지(淳昌郡誌)에 의하면 만일사의 회문산 산중 암자로 동암(東庵), 칠성암(七星庵)과 선적암(禪寂庵) 등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사와 흔적 없는 이들 암자는 회문산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듯하다. 회문산 만일사는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을 지키며,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상처 입고 산화한 모든 이들의 넋을 달래는 '해원(解冤)의 사찰'로 다가왔다.

▲만일사 도량 앞 장독대와 전경, 만일사 앞은 깊은 미륵정이 계곡이 있다. ⓒ 이완우
점심때가 되어서, 임실 강진면 갈담 장터에서 다슬기 식당을 찾았다. 이곳 섬진강의 갈담 다슬기는 지역 명물이다. 다슬기가 대개 길쭉한 나선형(탑형) 고동 같은 형상인데, 임실 강진 갈담 다슬기는 팥다슬기라 하여 팥알처럼 둥글고 도톰한 것이 특징이다.
교실 밖의 길동무 여행 참여자들이 몇 시간을 함께 차를 타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직 할 이야기가 많았다. 북 카페의 아늑한 자리에서 각자의 생활의 즐거움과 탐구 내용을 펼쳐 놓았다.
회문산을 걸으며 사색하고 대화하면서, 역사의 아픔과 자연의 생명력은 길동무들의 가슴 속에 묵직한 울림으로 남았다. 갈등의 역사를 간직한 산자락을 걸으며 상생과 화해의 길을 되새길 수 있었다. 강산은 동강 났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굽이진 길마다 새로운 생명의 꽃이 피어나고 평화로운 산들바람이 불기를 기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