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된 논산 돈암서원. 산앙루에서 내려다본 전경으로 왼쪽 건물이 보물 '응도당'이다. 많은 답사객이 건물에 시선을 두지만, 양성당 앞 작은 원정비에는 돈암서원을 이어온 스승과 제자들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 서준석
국도 1호선 논산에서 대전방향으로 십분여 가다보면 연산면 임리에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이 대로변 옆에 자리하고 있다. 입덕문을 들어서 양성당 앞에 서면 나지막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백대리석 비신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얹고, 연꽃무늬를 새긴 네모난 받침돌이 그 몸을 받치고 있다.
비신 첫머리에는 굵은 글씨로 '連山縣遯巖書院碑記(연산현돈암서원비기)'가 새겨져 있다. 오늘날 문화재 명칭으로는 돈암서원 원정비(院庭碑). 현종 10년인 1669년에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하면 대개 건물부터 떠올린다. 돈암서원 역시 보물로 지정된 강당인 '응도당'의 독특한 건축 구조가 먼저 소개되곤 한다. 그러나 건물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 무대일 뿐이다. 돈암서원의 진짜 이야기는 오히려 이 작은 비석에서 시작된다.
비석은 건물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을 말한다.

▲논산 돈암서원 양성당 앞에 세워진 원정비. 현종 10년인 1669년에 건립된 이 비석에는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학문과 덕행, 이를 계승한 제자들의 뜻이 새겨져 있다. ⓒ 서준석
가까이 다가가 손을 얹어보면 한여름에도 대리석 특유의 시원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다. 300년 넘게 비바람을 맞아온 돌치고는 놀라울 만큼 글자의 결이 또렷하게 살아 있다.
비문의 첫 문장은 "沙溪文元公金先生以崇禎辛未八月(사계 문원공 김선생이 숭정 신미년 8월에)"로 시작해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날짜를 적었고, 비석 뒷면 맨 끝에는 "己酉八月(기유팔월)"이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다. 숭정 신미년은 1631년, 기유년은 1669년. 스승이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38년 만인 1669년 8월, 문하생들이 이 비석을 세워 그를 기린 것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 그리고 그 이름 뒤에 놓인 관계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예학자 김장생이라는 인물이, 그리고 그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가 조금씩 드러난다.
비문이 그려낸 아버지와 아들

▲'연산현돈암서원비기'가 새겨진 돈암서원 원정비. 작은 비석이지만 조선 예학의 종장 김장생과 그의 학맥을 이은 인물들의 역사를 담아낸 돈암서원의 대표 기록물이다. ⓒ 서준석
비문에는 김장생과 아들 김집을 나란히 평가하는 문장이 나온다. "이룬 덕은 각기 다르나, 배움으로 삼고 가르침으로 삼는 바는 하나였다(成德各異而所以爲學爲敎者一也)."
성격과 기질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달랐지만, 학문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하나로 통했다는 뜻이다. 부자가 함께 벼슬보다 낙향과 강학을 택했다는 사실도 비문은 짚어 전한다.
김장생(1548~1631)은 본래 구봉 송익필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힌 인재였지만,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정묘호란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지나며 관직보다 고향에서의 강학을 택했다. 예란 격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땅한 자리를 정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고, 그 확신을 물려받은 이가 아들 김집(1574~1656), 호는 신독재다. 비문에 부자를 "덕은 달라도 뜻은 하나"라 적었듯, 김장생이 예학이라는 큰 틀을 세웠다면 김집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물려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김집의 문하에서 배출된 두 제자가 바로 이 비석에 이름을 남긴 송시열과 송준길이다. 스승의 아버지, 즉 김장생을 기리는 비석에 그 손제자뻘 되는 이들이 붓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학맥이 얼마나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비석 앞에 선 두 거인 — 직함이 말해주는 것

▲돈암서원 원정비 측면에 새겨진 송시열·송준길·김만기의 이름. 돌에 새겨진 이름들은 한 사람의 스승이 남긴 학문이 제자를 거쳐 조선 사회로 이어졌음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 서준석
원정비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관직명을 앞세운 채 나란히 새겨져 있다. 언뜻 지루해 보이는 이 긴 직함들을 하나씩 풀어보면, 뜻밖에도 당대 조선의 권력 지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문을 지은 송시열의 이름 앞에는 "문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 세자부."라고 적혀있다.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조선 문관 품계 가운데 가장 높은 정1품 상계로,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이른바 '삼정승'에게만 붙는 칭호다. 우의정은 그 삼정승 중 한 자리이니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급 국정 최고위직이며, '영경연감춘추관사'는 왕에게 학문을 강론하는 경연과 국가 역사 기록을 총괄하는 자리다. '세자부'는 다음 왕이 될 세자의 스승이었다. 이 비문을 쓸 무렵 송시열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중 한명이며 국가기록원장이고 미래의 왕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던 셈이다.
글씨를 쓴 송준길의 이름 앞에는 "문인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성균관좨주 세자찬선"이 적혀 있다. 정헌대부는 정2품으로 삼정승 바로 아래 급이며, 좌참찬은 오늘날의 부총리에 가까운 자리다. 여기에 성균관좨주(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으뜸 학자 자리)와 세자찬선(세자에게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까지 겸했으니, 그 역시 조정의 정치와 학문을 함께 틀어쥔 인물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과거 시험이 아니라 초야에 묻혀 있다가 학덕만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은 '산림(山林)'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벼슬을 좇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던 이들이 결국 국정 최고위직에까지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물려받은 김장생의 학맥이 조선 사회에서 얼마나 무거운 권위를 지녔는지를 보여준다.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이 관직 대신 '문인(門人)'이라는 호칭을 앞세워 스승의 스승을 기리는 비문에 글을 짓고 붓을 들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김장생이라는 이름의 무게였다.

▲'논산금석문대관'에 수록된 돈암서원 원정비 탁본. 350여 년의 세월을 견딘 비문은 탁본을 통해 동춘당 송준길의 단정하고 힘 있는 글씨를 더욱 생생하게 전한다. ⓒ 서준석
그런데 이 비석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직함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학자들은 이 원정비를 두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금석문 글씨 가운데 백미에 속한다"고 평가한다.
부총리급 요직을 두루 거친 정치가이기 이전에, 송준길은 당대 손꼽히는 명필이었다. 비신에 새겨진 획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글자 하나하나의 굵기와 간격이 정연하면서도, 획이 꺾이는 지점마다 미묘한 힘의 완급이 살아 있어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교과서 도판으로만 접하던 정형화된 서체와 달리, 이 비석의 글씨는 정면에서 마주하는 순간 훨씬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300여 년 전 이 돌 앞에서 붓을 쥐었을 한 사람의 호흡이, 아직도 획의 마디마디에 남아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관직의 이름들을 다 잊더라도, 이 글씨체 하나만으로 발걸음을 멈추는 답사객이 적지 않은 이유다.

▲원정비 상단에 새겨진 전서체 글씨로 뒤쪽과 연결해 읽으면 '연산현돈암서원비기' 가 된다. 김만기가 남긴 글씨로 김장생을 기리는 마음을 돌 위에 새긴 또 하나의 기록이다. ⓒ 서준석
붓을 든 증손자 — 직함 앞에 놓인 이름 하나
세 번째 이름, 전서체 표제를 쓴 김만기의 직함은 사뭇 결이 다르다. "문원공증손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통정대부는 정3품 상계, 당상관에 오른 품계다. 앞선 두 사람의 정1품·정2품에 비하면 아래다. 홍문관부제학은 국왕의 자문과 문서를 관장하는 홍문관의 이인자 자리로, 젊고 유능한 문신들이 거쳐 가는 요직이긴 했지만 아직 삼정승의 반열에는 근처도 가지 못한 자리였다.
그런데 눈여겨볼 대목은 이 긴 관직명 맨 앞에 붙은 다섯 글자다. "문원공증손(文元公曾孫)"—문원공은 김장생의 시호이니, '문원공의 증손자'라는 뜻이다.
관직보다 혈통을, 벼슬보다 집안을 앞세워 적은 것이다. 이 비석 앞에서 김만기는 조정의 관료이기 이전에 먼저 '그 어른의 자손'으로 소개되고 있다. 훗날 그의 벼슬은 눈부시게 높아진다. 딸이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가 되면서 그는 국구(國舅), 곧 임금의 장인이자 광성부원군에 올라 조정의 실세로 떠오르고, 세상을 뜬 뒤에는 정1품 영의정에 추증된다.
그러나 이 비석을 새길 무렵인 1669년, 그는 아직 그 자리에 오르기 한참 전, 정3품 관료이자 증조부의 이름 뒤에 겸손히 서 있던 젊은이였다. 훗날 어머니를 위로하려 한글로 소설을 지어 조선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는 서포 김만중이 바로 그의 동생이다.
상처 입은 돌, 그래도 남은 것

▲양성당에서 바라본 돈암서원 원정비. 자세히 보면 마모 흔적이 수백 년의 세월과 풍파를 고스란히 견뎌온 세계유산의 시간을 말해준다. ⓒ 서준석
이 귀한 비석도 세월의 흔적을 온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있다. 향토 기록에는 "대리석이어서 풍우로 마모된 것보다 동리 아이들의 손길에 훼손된 부분이 많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조정을 뒤흔들던 재상들의 문장과 글씨가 새겨진 이 돌이, 정작 가장 크게 부대낀 상대는 이름 없는 동네 아이들의 무심한 손장난이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남는다. 큰 역사와 작은 일상이 같은 돌 위에서 만난 흔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까이서 비신을 살펴보면 손자국처럼 매끈하게 닳은 부분과 잔 긁힘이 곳곳에 눈에 띈다. 지금도 야외에 그대로 노출된 채 비바람과 습기를 고스란히 맞고 있어, 보호각이나 강화유리 같은 최소한의 장치를 갖춰 더 마모되기 전에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에서 꾸준히 나온다.
조정 최고위직에 있던 이들의 문장과 글씨가 새겨진 돌이라 해도 세월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는 셈이니, 지금 마주한 이 생생한 필력을 다음 세대에도 온전히 넘겨주려면 관리의 손길이 조금 더 필요해 보인다.
서원 자체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본래 이 서원은 지금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1.5㎞ 떨어진 숲말에 있었으나, 잦은 수해를 견디지 못하고 18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 비석 역시 그때 서원을 따라 함께 자리를 옮겼다. 그런 까닭에 비문 속에 기록된 서원의 구조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배치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긋남조차, 이 비석이 실제로 겪어온 세월의 증거로 남아 있다.

▲돈암서원 원정비 받침돌에 새겨진 연화문(연꽃무늬).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맑은 꽃을 피우는 상징으로, 선비의 덕성과 학문의 순수함을 담아 비석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 서준석
이름이 남긴 세계유산
돈암서원 원정비 앞을 떠나며 다시 헤아려본다. 이 비석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 김집은 아버지의 학문을 정리해 전했고, 제자 송시열과 송준길은 그 학문을 붓과 문장으로 새겼으며, 증손자 김만기는 조상의 이름 앞에 자신의 글씨를 얹었다. 그의 동생 김만중은 조선 문학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한 사람의 삶이 남긴 파장이 이토록 여러 갈래로 퍼져나간 사례는 흔치 않다. 김장생은 큰 관직을 탐하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가르침은 조정의 재상들을 움직였고, 그 후손 중 하나는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었다. 돈암서원 원정비는 그러니까 한 예학자를 기리는 데서 그치는 비석이 아니라, 그의 삶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번져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계보도에 가깝다. 비석은 말이 없지만, 그 위에 새겨진 이름들은 지금도 그 이야기를 또렷하게 들려주고 있다.
응도당의 지붕선도, 양성당의 배치도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세계유산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지기 쉬운 것은 결국 그 공간을 채웠던 사람들의 얼굴이다. 돈암서원을 찾는다면, 건물의 규모를 재기 전에 마당 한쪽의 이 작은 비석 앞에 한 번쯤 멈춰 서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논산포커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