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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전설적인' 독립운동가가 있다. 6.10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총지휘했던 인물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후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불과 서른세 살의 나이로 순국한 불세출의 항일 투사다. 안동 출신의 막난 권오설 선생이 바로 그다.

6.10 만세운동은 대표적인 독립운동이지만, 정작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모른다. 교과서에서조차 순종의 인산일에 벌인 학생들의 시위 정도로 서술되어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한데 묶인 단원의 제목도 '식민지 차별 교육에 저항한 학생들의 항일 운동'이다.

학생들이 주도한 건 사실이지만, 중요한 설명이 빠져 있다. 그들은 당시 전 세계를 휩쓸던 사회주의를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나 독서회 등의 조직을 꾸려 공부했고, 사회주의는 그들의 항일 운동에 이념적 기반이 됐다.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이다.

1926년에 일어난 6.10 만세운동은 한 해 전 출범한 조선 공산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권오설은 조선 공산당의 창당 주역이기도 하다. 그는 인근 마을의 선배였던 김재봉이 구축해 놓은 비밀 조직과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김재봉은 조선 공산당 초대 비서로 추대된 인물이다.

권오설의 자취

 잡풀더미에 가려진 묘소 표지석. 잡풀을 걷어내니 묘소 가는 방향을 일러주는 화살표가 보였다.
잡풀더미에 가려진 묘소 표지석. 잡풀을 걷어내니 묘소 가는 방향을 일러주는 화살표가 보였다. ⓒ 서부원

안동 풍산 가일 마을에서 태어난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농민운동과 청년 교육, 노동운동을 선도하고, 특히 호남과 영남에서 두루 활동했던 드문 독립운동가다. 광주의 전남도청 근무 시절 3.1 운동에 참여한 뒤 옥고를 치렀고, 이후 고향에 돌아와 농민운동과 청년 교육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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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노농총동맹의 핵심 간부가 되어 전국의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조직하고 지원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 비서로서, 청년 지식인들을 항일 투쟁의 선봉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그는 1930년 순국한 지 75년이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

오랜 세월 그의 이름은 함부로 언급할 수조차 없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옥중 순국했다고 해도 사회주의자는 독립운동의 공적을 내세울 수 없었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어도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떠안아야 했다. 당시의 조선 공산당과 지금의 북한 노동당은 엄연히 다른 정당인데도 막무가내였고, 그 유족들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분단의 모순에 기댄 군사독재정권이 지속되면서 사회주의자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됐고, 권오설은 마치 그들의 수괴인 양 치부됐다. 잊힌 그의 이름과 공적을 되살리고 기리는 건, 반쪽짜리 현대사의 빈 곳을 채우는 일이며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우리 사회를 바루려는 노력이다. 그의 자취를 찾아 지난 11~12일 이틀 일정으로 안동 풍산에 왔다.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아이들의 말마따나, 안동은 가히 독립운동가들의 도시였다. '경북'이라는 지역 이름을 앞세운 독립운동 기념관이 건재하고, 어느 마을에 가든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들이 발에 치일 듯 많다. 도시의 초입에 내건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수식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본향이라는 의미로 읽혔다.

안동 시내와 하회마을을 잇는 풍산 지역과 낙동강, 반변천에 기댄 내앞 마을은 차라리 독립운동의 '성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이상룡과 그 후손들의 탯자리인 임청각이 우뚝하고, 사분오열된 무장 독립운동 세력들을 통합해 낸 '만주벌의 호랑이' 김동삼의 자취가 선연하다. 안동이 없었다면, 조국의 독립도 없었다.

흔히 보수 정치의 텃밭으로 불리는 고장인데, 버젓이 '안동의 모스크바'를 내세운 곳도 있다. 조선 후기 혁신적인 유학자들이 집성촌을 이루던 안동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좋은 토양이 됐다. 비록 극심한 가난으로 학업을 이어가진 못했지만, 권오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거물급 사회주의자로 거듭났다.

마을 대표 인물

 권오설 선생 묘소 가는 길. 잡풀이 우거져 있어 길이 어딘지 알 수조차 없다. 저 먼발치로 검은색 빗돌(사진 위)이 있어 그의 묘소임을 알 수 있었다.
권오설 선생 묘소 가는 길. 잡풀이 우거져 있어 길이 어딘지 알 수조차 없다. 저 먼발치로 검은색 빗돌(사진 위)이 있어 그의 묘소임을 알 수 있었다. ⓒ 서부원

하회마을 가는 길, 그가 나고 자란 풍산면 가곡리 초입엔 그의 공적을 기린 빗돌이 세워져 있다. 도로 표지판과 마을 안내 지도에도 그의 이름은 또렷하다. '권오설 선생 기적비', '권오설 선생 생가터', '권오설 선생 묘소' 등 그는 명실공히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안내판에서만 볼 수 있을 뿐 정작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더는 표지도 없을뿐더러 내비게이션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결국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물론, 그마저도 여의친 않다. 얼마 남지 않은 주민도 대부분 귀가 어두운 어르신들이어서다.

마치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인 양 마을의 모든 집의 문을 두드렸다. 권오설을 찾기 위해선 권오설을 아는 사람부터 수소문해야 했다. 여름 땡볕에 한 시간 가까이 돌아다닌 뒤에야 가까스로 생가터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를 잘 알고 있다는 한 촌로가 손을 이끌고 간 곳이다.

생가터는 그나마 마을 안에 있어 다행이지만, 묘소는 인적조차 없는 곳이어서 난감했다. 주민들은 손가락으로 대강의 방향만 가리키며 마을의 뒷산에 있다고만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정확한 주소를 알아낸 뒤 무작정 산에 올랐다. 지도상에 없는 길을 새로 내는 심정이었다.

한참을 헤맨 뒤 드디어 잡풀에 파묻힌 표지석을 발견했다. 검은색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못 찾았을 것이다. 입구라고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지만, 길이 없었다. 스마트폰 지도에는 바로 근처를 가리켰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봉분이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그렇게 한참을 헤맸다.

봉분이 워낙 작아 이번에도 검은색 표지석이 아니었다면 찾기 어려웠을 듯하다. 더욱이 무릎 높이의 잡풀이 무성해 어디가 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길을 찾다 말고 아이들이 잡풀을 걷어내고 밟아가며 새 길을 냈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아이들 종아리에 생채기가 났다.

아이들이 받은 충격

 권오설 선생의 생가터. 지방 문화재인 남천고택 표지판 뒤로 보이는 울타리로 에워싸인 밭이 생가터라고 한다. 표지판에서 설명하는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구조보다 권오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한 아이의 반문에 무릎을 쳤다.
권오설 선생의 생가터. 지방 문화재인 남천고택 표지판 뒤로 보이는 울타리로 에워싸인 밭이 생가터라고 한다. 표지판에서 설명하는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의 구조보다 권오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한 아이의 반문에 무릎을 쳤다. ⓒ 서부원

"6.10 만세운동을 이끈 거물급 독립운동가가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하네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한 분의 묘소를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건가요? 이럴 거면 차라리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단골 시험 문제인 까닭에 6.10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알고 있는 아이들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몇몇은 추석 때 성묘하는 자기 할아버지의 무덤만도 못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묘소 앞에서 국가보훈부의 책임이냐,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냐를 두고 하나 마나 한 즉석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을 갈라치기 하려는 게 아닐까요? 어느 독립운동가는 집채만 한 무덤에다 모교를 비롯해 동네방네 곳곳에 동상까지 세워 놓았다고 하던데…"

굳이 대꾸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답을 찾아냈고, 답사 현장에서 교훈을 깨우쳤다. 위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그의 생가터와 무릎 높이의 잡풀에 가는 길조차 막혀 버린 묘소를 보며 황당해했다. 해방된 지 한 세기가 다 지나도록 독립운동과 건국, 친일과 전쟁, 분단이 마치 '따로국밥'처럼 겉도는 기괴한 현실을 가슴으로 느끼는 듯했다.

폭염 속에도 을씨년스러웠던 묘소를 돌아 나오며, 갑자기 '막난(莫難)'이라는 그의 호가 머리를 스쳤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당시 가족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름 앞에 쓴 글귀로 전한다. 직역하면, '힘들지 않다'는 뜻이다. 가족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일 테지만, 그의 치열했던 삶을 떠올려 보면 그렇게만 읽히진 않는다.

조국의 독립을 향한 외길의 삶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 따위는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옹골찬 다짐을 드러낸 게 아닐는지. 아이들 앞에서 두 글자를 '없을 막'에 '어려울 난'이라고 훈독해 주었더니, 이심전심 예외 없이 이렇게 해석했다. 어느새 그들에게 권오설은 6.10 만세운동보다 더 익숙한 이름이 됐다.

#권오설#610만세운동#조선공산당#풍산면가일마을#막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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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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