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거시경제 분석도, 종목 추천도 아니다. 평범한 시민이 주식시장에서 마주치는 욕망, 불안, 확신, 후회 같은 감정을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시선으로 읽어보려는 기록이다.
"오늘은 다행히 비가 안 오더라."
내 말에 남편이 대꾸했다.
"비 엄청 왔는데?"
같은 날이지만 오전 7시 전에 출근한 남편과 9시 넘어 집을 나선 나의 하늘은 달랐다. 어느 날은 반대이기도 했다. 9시 전에 도착한 동료들의 우산은 보송보송했는데, 9시 반 출근 직전 쏟아진 폭우에 나는 신발이 젖은 채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또 어떤 날은 남편만, 어떤 날은 나만 비를 맞았다. 그날 '진짜 날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비를 맞은 사람 쪽이었을까, 마른 길을 걸은 사람 쪽이었을까.
급락... 급등... 요동치는 주식 시장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7월의 증시도 그랬다. 같은 종목을 두고도 시각마다, 시장마다 다른 날씨가 펼쳐졌다.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급락 알림이 왔다가 몇 시간 뒤에는 급등 알림이 왔다. 개장 직후 매수 사이드카가 걸리고, 다음 날에는 매도 사이드카가 걸렸다.
마침, 한 반도체 회사의 주식이 미국 시장에서도 거래되기 시작한 주였다. 뉴욕이 올려놓은 가격을 다음 날 서울이 걷어가고, 서울이 무너뜨린 가격을 다시 뉴욕이 되돌리는 일이 반복됐다. 며칠 동안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더니, 결국 뉴욕도 서울도 나란히 내린 자리에서 한 주가 끝났다.
그 사이 이 회사가 무슨 큰일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공장은 같은 속도로 돌아갔고, 이미 맺은 장기 공급계약도 그대로였다. 그 며칠 동안 달라진 것은 회사가 아니라 가격이었다. 문득 생각했다. 애초에 제자리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나는 그 며칠 동안 관망했다. 한 주도 사지 않았고 팔지 않았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시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피치 못할 관망이었다. 어쨌든 매일 앱을 열었다. 살 수도 팔 수도 없으면서 왜 매일 그 화면을 확인했을까.
돌이켜보니 나는 '진짜 가격'이 찍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회사의 값이 얼마인지 알려줄 하나의 숫자. 하지만 아침에 답을 찾은 것 같으면 저녁이 지웠고, 저녁에 확신이 생기면 다음 날 아침이 다시 지웠다.
이런 주간을 보내고 나면 익숙한 질문이 떠오른다. 실적이 좋다는데 왜 떨어질까. 나도 오래 이 질문을 붙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질문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질문이 성립하려면 시장이 실적을 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기업 순이익이 사상 최고'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경제, 증권사 보고서나 관련 뉴스들은 하나 같이 물었다. '그래서 증가율은?' 증가율이 확인되면 다시 묻는다. '그 증가율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거기에 답하면 또 다른 질문이 돌아온다. '이미 주가에 반영된 것 아니야?' 어떤 숫자를 내밀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실적을 봐야지"라고 말은 하면서 가격만 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해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다가 정유회사 주식을 샀다. 어쩌다 수익률이 10%를 넘어섰다. 그래서 팔았다. 이 정도면 많이 벌었지, 정유주는 급등락이 크다니까 팔자고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급등락이 큰 종목인 건 맞았다. 하지만 올해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변수가 생겼다. 매일 나오는 전쟁 기사의 온도가 달랐고, 단기간에 끝날 일로 보이지 않았다. 정유주의 가격이 치솟았다. 그러니 아쉬웠다. '아, 그냥 갖고 있을 걸 그랬나.'
호실적에도 급락하는 반도체 주식만 들고 있으려니 불안했다. 손에서 수익률이 빠져나가니, 다른 데서라도 아쉬운 수익률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헷지(선물·옵션 같은 파생상품으로 현물(주식) 가격 변동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해 반대 포지션을 함께 갖는 위험관리 기법) 역할을 해준다던 내 배당주도 마이너스였고 금 상승률도 꺾였다.
안전망이 어디 있다는 건지 내 포트폴리오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지난해 말 이미 팔아버린 정유주까지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수익률을.
나의 펀더멘털도 봐야 했거늘
바로 그 지점에서 라캉이 떠올랐다. 라캉은 욕망의 근원적 대상이자 바라는 것을 '대상 a'라고 불렀다. (라캉 책 가운데 비교적 쉽게 풀이한 것으로 보여 고른)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에서 저자 장용순은 '대상 a'를 '캐비어'에 비유한다. 사람은 '저 캐비어만 먹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는 환상을 품지만, 막상 캐비어를 먹는 순간 그 환상은 사라지고 욕망은 다른 대상 위에 덧씌워진다면서.
장용순은 루이비통 가방을 사면 에르메스가, 벤츠를 사면 람보르기니가 갖고 싶어지는 것도 같은 구조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캐비어나 루이비통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덧씌워진 '저것만 가지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내 투자도 그랬다. 급등했던 반도체 주식이 흔들리자, 애초에 팔았던 정유주를 다시 탐내고, 최근엔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안전자산을 기웃대며 안심을 찾고 싶었다. 만족은 오지 않았고, 욕망만 자리를 옮겼다.
그러니 점검해야 할 펀더멘털(fundamental)은 기업만이 아니었다. 펀더멘털이란 한 나라나 기업의 경제 상태를 가늠하는 가장 기초적인 지표를 말한다. 그 어원은 '바닥'이다. 펀더멘털을 본다는 건 결국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인 셈이다. 그런데 나는 회사의 바닥은 들여다보려고 애쓰면서, 정작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바닥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흔들린 것은 회사보다 오히려 나였는데도 말이다. 기업의 재무제표에는 마지막 페이지가 있지만, 내 마음의 바닥에는 끝이 없었다. '펀더멘털을 보라(주가의 단기 변동보다 기업의 기초 체력과 내재가치를 재무제표·실적·성장성 등으로 먼저 점검하라는 뜻)'는 오랜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처음부터 봐야 할 바닥이 두 개였는지도 모른다.
그 며칠 동안 내가 한 '관망'은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었다. 팔아야 하나, 지금이 저가 매수의 기회인가. 생각은 끊임없이 오갔다. 관망이란 그런 생각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었다. 감정과 사실을 구분해 현상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그 회사의 진짜 가격이 얼마인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다만 들여다봐야 할 바닥은 기업의 실적뿐 아니라, 그 숫자를 들여다보는 내 마음에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알림이 울릴 때, 나는 그 두 개의 바닥을 함께 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참고도서 : 장용순,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이학사, 2023).
펀더멘털(어원) 출처: Online Etymology Dictionary(etymon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