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교육위원회가 '학교시민교육 국가 기본원칙(안)'을 내놓았다. 학교에서는 오래전부터 시민교육의 필요성을 이야기해 왔지만, 정작 교실에서는 정치적 중립성 논란과 민원에 대한 부담 때문에 시민교육을 마음껏 펼치기 어려웠다. 이번 기본원칙은 학교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교사는 어떤 원칙으로 학생들과 만나야 하는지를 국가 차원에서 처음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원칙을 세우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선언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그것을 학교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제도와 문화가 함께 마련될 때 비로소 교육이 된다.
시민교육은 교과가 아니라 학교의 삶이다
이번 기본원칙에서 가장 반가운 대목은 시민교육을 특정 교과에 가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민교육은 사회나 도덕 시간에만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니다. 모든 교과 수업은 물론 학생자치와 생활교육, 상담, 학교문화와 공동체 활동까지 학교생활 전반에서 이루어져야 할 교육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시민교육의 본질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시민은 교과서 속에서 길러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설명을 듣는 것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살아가는 경험을 통해 익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설명보다 삶을 먼저 배운다. 다른 의견을 끝까지 듣는 태도, 힘없는 학생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자세, 갈등을 대화로 풀어 가는 모습,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양심 앞에서는 책임 있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민주주의를 배운다.
교실은 민주주의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살아 보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번 기본원칙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 민주주의, 법치주의 같은 헌법의 가치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존중과 관용, 참여와 협력, 미디어 문해력, 혐오와 차별을 거부하는 시민의식까지 오늘날 민주사회가 요구하는 핵심 내용을 담았다.
특히 '명확성의 원칙'과 '논쟁성의 원칙'은 매우 바람직하다. 헌법 가치와 역사적·학문적으로 검증된 사실은 분명하게 가르치되, 사회에서 의견이 갈리는 정치적 사안은 여러 관점을 균형 있게 다루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같은 생각을 만드는 제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면서 더 나은 공동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교사는 정답을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토론하며 판단하도록 돕는 길잡이여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교사에게 민주주의는 있는가.
교사는 교실에서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공교육의 신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교실에서의 정치적 중립성과 교사의 시민으로서 정치적 기본권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교단에서는 정치적 편향을 경계해야 하지만, 교단 밖에서 교사는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힐 권리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해 왔다. 학생들에게 민주시민이 되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교사는 시민답게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이라면 시민교육은 스스로 설득력을 잃는다.
민주주의는 권리와 책임이 함께 갈 때 성숙한다. 학생에게는 시민성을 가르치면서 교사에게는 시민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다면 교육은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물론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한다고 해서 교실에서 정치활동을 허용하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교실 안과 밖은 더욱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교실에서는 정치적 중립성을 철저히 지키고, 교실 밖에서는 한 시민으로서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존중받는 것이 민주국가의 원리에 더 가깝다.
이번 기본원칙은 교사의 교육활동을 보호하겠다는 뜻도 담고 있다. 그러나 교육활동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사의 시민적 존엄과 권리까지 함께 보장할 때 비로소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칠 자격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선언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다. 교육 현장은 이미 수많은 선언과 지침을 경험했다. 그러나 선언만으로 학교는 바뀌지 않았다. 학교를 바꾸는 것은 교사가 안심하고 교육할 수 있는 제도이고,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학교문화이며, 교육을 정치적 공방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사회적 신뢰이다.
시민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과정에 몇 줄을 더 적는다고 시민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민원과 정치적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토론 수업을 할 수 있는 여건, 학생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학교문화,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믿어 주는 사회적 합의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품성과 양심, 그리고 서로를 믿는 문화가 있을 때 생명력을 얻는다.
'학교시민교육 국가 기본원칙(안)'은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방향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다.
교사의 교육활동을 보호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교실을 만들고, 교사가 민주주의를 삶으로 보여 줄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법과 제도, 학교문화와 사회적 신뢰를 함께 세우는 일도 더는 미룰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학생들에게만 요구되는 가치가 아니다. 학교를 이루는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리고 실천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육이 된다.
교실은 민주주의를 연습하는 가장 작은 광장이다. 그 광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존중하며 자유와 책임을 함께 배울 때 시민교육은 하나의 교과를 넘어 학교의 문화가 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선언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있는 교실, 민주주의를 살아갈 수 있는 교사,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문화를 함께 세우는 일이다. 그럴 때 시민교육은 문서 속 원칙이 아니라 학교의 일상이 되고, 우리 사회를 조금씩 바꾸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