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화정비 앞면(왼쪽)과 뒷면. 앞면에는 '황화정(皇華亭)' 세 글자가, 뒷면에는 1670년 여산군수 정채화가 황화정을 다시 세우고 비석을 건립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사라진 황화정의 역사와 중건 과정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물적 증거다. ⓒ 서준석
충남 논산시 연무읍 황화정리. 육군훈련소 입영심사대가 있는 마을이다. 입영심사대 맞은편 길로 접어들어 2km 남짓 들어가면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알려진 선샤인랜드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황화4리 버스정류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류장 인근에는 한때 황화초등학교가 있었다. 1930년 문을 연 학교는 8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2022년 폐교했다. 정자는 사라졌지만 '황화'라는 이름은 마을과 학교에 남았다. 지금은 한적한 농촌마을이다. 그러나 몇백 년 전 풍경은 전혀 달랐다.
한양에서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향하던 관리와 선비, 과거를 보러 가던 사람과 장사꾼들이 이 일대를 오갔다. 조선의 큰길, 삼남대로였다. 그리고 호서와 호남이 만나는 길목에 정자 하나가 서 있었다. 황화정(皇華亭)이다.
송시열이 남긴 '황화정' 기록
경치를 바라보며 시를 짓던 평범한 정자가 아니었다. 새로 부임하는 전라관찰사와 임기를 마친 관찰사가 만나 관인(官印·관인), 즉 관청의 도장을 넘겨주고 넘겨 받던 곳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도 경계에서 전임 도지사가 신임 도지사에게 공식적으로 권한을 넘겨주는 것과 비슷하다.

▲우암 송시열이 쓴 <여산군황화정기(礪山郡皇華亭記)> . 여산군수 정채화의 요청으로 지은 이 글에는 황화정의 위치와 중건 과정, 교귀의식(交龜儀式), '황화(皇華)'라는 이름에 담긴 뜻이 기록돼 있다. 황화정의 역사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로 꼽힌다. (송자대전 캡쳐) ⓒ 서준석
황화정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히 남긴 사람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본관이 은진(恩津)인 그는 여산군수 정채화의 부탁을 받고 <여산군황화정기>, 흔히 <황화정기>라 부르는 글을 썼다. 첫 문장부터 눈길을 끈다.
"皇華亭者 不知作於何時(황화정자 부지작어하시)."
"황화정은 어느 때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쓰지 않았다. 대신 문헌에서 확인되는 사실을 제시했다.
"按輿地勝覽 亭在礪山郡北十一里(안여지승람 정재여산군북십일리)."
"여지승람을 살펴보니 정자가 여산군 북쪽 11리에 있다"는 내용이다. 송시열은 이를 근거로 황화정이 적어도 성화연간인 1465~1487년에는 존재했다고 봤다. '1460년대에 창건됐다'고 단정하기보다는 15세기 후반에는 이미 문헌에 등장하는 오래된 정자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향토연구가 박영록씨는 <동국여지승람>의 거리 기록과 옛길 등을 토대로 현재 연무읍 원황마을 가늠재 일대를 옛 황화정 터의 유력한 후보지로 보고 있다. 다만 정확한 위치는 앞으로 조사와 고증이 필요하다.

▲황화정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충남 논산시 연무읍 황화4리 버스정류장 일대. 오른쪽에는 예본교회가 자리하고, 정류장 뒤편 길은 전북 익산시 여산면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마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라관찰사가 관인을 넘겨받던 황화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삼남대로의 길목이다. ⓒ 서준석
호서와 호남이 만나는 정자
송시열은 황화정의 모습을 짧은 문장으로 남겼다.
"亭凡三架 背震面兌 當兩湖之交 形勢俱焉(정범삼가 배진면태 당양호지교 형세구언)."
정자는 세 칸 규모였고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바라봤다. 특히 '양호지교(兩湖之交)', 즉 호서와 호남이 만나는 곳에 자리했다.
조선시대 이곳은 충청도 은진현에서 전라도 여산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그 경계에서 중요한 국가 의식이 열렸다.
"今則只爲湖南按使交事時所住也(금즉지위호남안사교사시소주야)."
"지금은 호남 관찰사가 일을 교대할 때 머무는 곳이다."
바로 교귀(交龜·교귀)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왕을 대신해 한 도의 행정과 재판, 군사를 살피던 최고 책임자였다. 관찰사가 바뀌면 신·구 관찰사가 도의 경계에서 만나 인신(印信), 즉 공식 도장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 전임자의 권한은 끝나고 새 관찰사의 책임이 시작됐다. 황화정이 바로 그 현장이었다. 경상도에는 문경새재의 교귀정(交龜亭·교귀정)이 같은 역할을 했다.
중국 사신도 머물렀을까
황화정에는 중국 사신이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송시열은 <황화정기>에 "世傳(세전)", 즉 '세상에 전해오기를'이라는 말을 앞세워 중국 사신이 남쪽 바다에서 올라와 북쪽 육로로 갈 때 이곳에서 머물며 음식과 물자를 제공받았다고 적었다. 송시열도 이를 확인된 사실로 단정하지 않았다. 17세기에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고 기록했을 뿐이다.
황화정이 처음 사라진 이유도 마찬가지다.
"豈或燬於壬辰倭亂之日乎(기혹훼어임진왜란지일호)."
"혹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은 추측으로 남겼다.
오랫동안 사라져 있던 황화정을 다시 세운 사람은 여산군수 정채화(1611~1677)였다. 송시열은 정채화가 1669년 겨울 여산군수로 부임한 뒤 다른 일보다 먼저 황화정 복원에 나섰고, 1670년 가을 공사를 시작해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마쳤다고 적었다.
그런데 정자를 다시 세우자 논란이 일었다.
"比者民飢財竭 事多曠廢(비자민기재갈 사다광폐)."
백성은 굶고 재정은 바닥났으며 처리하지 못한 일도 많은데, 군수가 왜 정자 복원에 서두르느냐는 비판이었다. 350여 년 전의 논쟁이지만 낯설지 않다. 송시열은 <논어>의 한 구절을 꺼냈다.
"爾愛其羊 我愛其禮(이애기양 아애기례)."
"너는 그 양을 아끼지만 나는 그 예를 아낀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의례에 쓰는 양을 아까워하자 공자가 했다는 말이다. 송시열이 강조한 것은 정자라는 건물 자체가 아니었다. 황화정에서 행해지는 예(禮), 즉 국가의 행정질서와 권한을 넘겨주는 의식에는 돈으로만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황화'라는 이름에 담긴 정치 철학

▲충남 논산시 연무읍 황화3리 어르신회관 앞에 서 있는 황화정비(皇華亭碑). 1670년 여산군수 정채화가 황화정을 다시 세운 뒤 세운 비석으로, 앞면에는 '황화정(皇華亭)'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자는 사라졌지만 비석은 오늘날까지 황화정의 존재를 전하고 있다. ⓒ 서준석
그렇다면 왜 이름이 '황화'였을까.
그 뿌리는 중국 고전 <시경>의 '황황자화(皇皇者華)'에 닿아 있다. 송시열은 "皇華者 古之人君遣使臣之詩也(황화자 고지인군견사신지시야)"라고 썼다. "황화는 옛 임금이 신하를 사신으로 보낼 때 부르던 시"라는 뜻이다. 이어 <황화정기>의 핵심이라 할 만한 문장이 나온다.
"君之使臣 固欲其宣上德而達下情(군지사신 고욕기선상덕이달하정)."
임금이 신하를 보내는 것은 위의 뜻과 덕을 백성에게 전하고, 아래 백성의 사정을 다시 임금에게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좋은 관리는 중앙의 명령만 아래로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백성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다시 위로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또 "臣能從善則可以善君 臣能聽諫則可以諫君矣(신능종선즉가이선군 신능청간즉가이간군의)"라고 했다. 좋은 의견을 따르고 충고를 들을 줄 아는 신하라야 임금도 바르게 도울 수 있다는 의미다.
새 전라관찰사는 황화정에서 관인을 넘겨받았다. 그때 정자에 걸린 '황화'라는 두 글자는 새로 권력을 받은 관리에게 묻고 있었을 것이다. 백성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됐는가. 충고에 귀 기울일 수 있는가. 왕과 백성 사이를 제대로 이어줄 수 있는가.
황화정은 관인을 받는 곳이면서 동시에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일깨우는 공간이었다.
기록 속에서 되살아난 '교귀'의 하루
송시열의 글이 황화정의 뜻을 보여준다면 풍석 서유구(1764~1845)가 남긴 <완영일록(完營日錄)>은 실제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보여준다.
전라관찰사로 부임하던 서유구는 한양을 떠나 공주와 노성, 은진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갔다. 여섯째 날 아침 은진을 출발해 30리를 가 황화정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전라도 각 고을과 역참, 군사시설에서 올라온 공문서를 받은 뒤 전임 관찰사를 기다렸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났다. 서유구는 가마를 타고 나가 전임 관찰사와 교귀 절차를 마쳤고, 자신이 전라도 경계에 도착했다는 보고문을 조정에 올렸다. 이 기록을 읽고 황화정리의 길을 다시 바라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200여 년 전 이곳에서 전라도의 최고 책임자 두 사람이 나라의 도장을 주고받았다.
<춘향전> 속 이몽룡도 지나던 길
황화정이라는 이름은 관청 기록에만 남아 있지 않다. <춘향전>과 판소리 <춘향가>에도 등장한다.
이몽룡이 한양에서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면 공주와 노성, 은진을 지나 지금의 연무읍 화석교 부근으로 추정되는 닥다리(楮橋·저교), 황화정, 가늠재, 여산으로 길이 이어진다.
판본에 따라 '황화졍' '황화정' '황화장이'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황화정이 관청 문서 속에만 있던 공간이 아니라, 한양에서 호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으로 널리 알려졌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황화정은 언제 사라졌을까. 미산 한장석(1832~1894)이 1868년 남쪽 지방을 여행하며 남긴 <남행집(南行集)>에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는"지금은 다만 비문만 있다" 라고 적었다. 당시 이미 정자는 사라지고 비석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향토연구가 박영록씨는 황화정이 1862년 은진지역 민란 과정에서 소실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를 확정할 기록은 부족하다. 따라서 '1862년 민란 때 불탔다'고 단정하기보다 민란 과정에서 소실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적어도 1868년에는 정자가 사라지고 비석만 남아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정자는 없고, 비석은 떠돌았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황화3리 어르신회관 국기게양대 앞에 보존된 황화정비(皇華亭碑). 1670년 여산군수 정채화가 황화정을 다시 세우면서 함께 세운 비석으로, 사라진 황화정의 역사와 중건 사실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물적 증거다. ⓒ 서준석
황화4리에서 옛터를 살핀 뒤 황화3리로 향했다. 이곳 어르신회관 앞에는 황화정비가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앞면에 큼지막한 세 글자가 보인다.
'皇華亭(황화정).'
비신(碑身·비신)은 높이 128㎝, 폭 55㎝, 두께 17㎝ 정도다. 뒷면에는 황화정의 역사를 확인할 결정적인 기록이 새겨져 있다.

▲논산시 연무읍 황화3리 어르신회관에 앞에 있는 황화정비 뒷면. 1670년 여산군수 정채화가 황화정을 다시 세우고 비석을 건립했음을 전하는 기록으로, 황화정의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 서준석
"崇禎紀元後庚戌八月 行郡守東萊後人鄭采和 復建亭立石(숭정기원후경술팔월 행군수동래후인정채화 복건정입석)."
"숭정 기원 후 경술년 8월, 군수 동래 정씨 후손 정채화가 정자를 다시 세우고 비를 세웠다"는 뜻이다.
1670년 정채화가 황화정을 다시 세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실물이다. 하지만 정자가 사라진 뒤 비석도 제자리를 잃었다. 수철천 진흙 속에 묻혀 있던 비석은 1970년 새마을사업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후 효죽마을과 봉곡서원 밖을 거쳐 2017년 황화정리 노인정 뜰로 옮겨졌다.
황화4리에는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터가 있고, 황화3리에는 비석이 있다. 터에는 비석이 없고, 비석 곁에는 정자가 없다. 350여 년 전 하나의 공간에 있던 정자와 비석이 지금은 서로 떨어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사라진 정자, 사라진 길

▲충남 논산시 연무읍 황화4리 버스정류장 일대. 향토사 연구에서는 이곳을 조선시대 황화정이 있었던 유력한 터로 보고 있다. 지금은 큰 나무 아래 주민들이 쉬는 데크가 마련돼 있지만, 수백 년 전 이곳은 호남과 호서를 잇는 삼남대로의 길목이자 전라관찰사가 관인을 넘겨받던 역사 현장이었다. ⓒ 서준석
옛터를 찾기 어려운 것은 정자만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정자로 가던 길도 크게 바뀌었다. 조선시대 삼남대로와 오늘날 도로는 정확히 겹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신작로와 1970년대 호남고속도로, 이후 새 도로가 잇따라 생기고 농경지와 하천도 정비되면서 옛 지형은 크게 달라졌다.
따라서 지금의 도로만 놓고 거리를 재서는 황화정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렵다. 옛 지도와 <여지도서(輿地圖書)>, <완영일록>의 이동 기록, <춘향전>의 옛길, 주민들의 전승 등을 함께 맞춰봐야 한다.
현재 원황마을 가늠재 일대가 유력한 후보지로 제시되는 이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헌과 옛길, 지형을 토대로 한 추정지다. 황화정을 복원하려면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 옛 지도와 토지 자료의 비교, 당시 건축 방식에 대한 연구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답사를 마치고 다시 황화4리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차 한 대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조용해진다. 지금만 보면 평범한 농촌마을이다. 하지만 <황화정기>와 <완영일록>을 읽고 이곳에 서면 눈앞의 길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어느 날은 한양에서 내려온 새 전라관찰사가 이 길로 들어왔을 것이다. 반대편에서는 임기를 마친 관찰사가 올라왔을 것이다. 두 사람은 황화정에서 만나 나라의 관인을 주고받았다. 한 사람의 권력이 끝나고, 또 한 사람의 책임이 시작됐다.
송시열은 <황화정기> 마지막에서 이곳을 지날 관리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能顧名而思其實 求賢自助 從善聽諫(능고명이사기실 구현자조 종선청간)."
"그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며, 어진 사람을 구해 자신을 돕게 하고, 좋은 말을 따르며 충고에 귀 기울이라."
350여 년 전 새로 권력을 받은 관리에게 건넨 말이다. 지금 읽어도 그 뜻은 낡지 않았다. 황화정을 되살리는 일도 정자 한 채를 새로 짓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정확한 고증으로 옛터를 찾고, 황화정비와 삼남대로, 관찰사의 교귀 의식을 함께 밝혀야 한다. 그래야 이곳은 조선의 길과 지방행정, 목민(牧民)의 정신을 보여주는 역사공간이 될 수 있다.
정자는 사라졌다. 옛길도 희미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황화'라는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마을은 여전히 황화정리이고, 90년 넘게 아이들을 길러낸 학교도 황화초등학교였다. 어쩌면 황화정을 되찾는 일은 사라진 정자 한 채를 다시 세우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수백 년 동안 논산 땅과 사람들의 삶 속에 이어져 온 '황화'라는 이름에, 잊힌 역사와 제자리를 다시 찾아주는 일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논산포커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