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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4월 "새로운 인간상, 보다 개선된 인간관계"의 정립을 위하여 무크 <새로운 인간>이 창간되었다. 발행 겸 편집인 윤영구, 발행처는 새로운 인간이다.

창간호는 특집① '현대의 인간관', ② '내가 보는 4.19혁명', 일반 논문 '인간관계로서의 노사문제', '부패와 관료지도층', '한국 정당의 체질 혁신론' 등이 실렸다.

무기명의 권두언 '민주적 인간관계의 확립' 제하의 창간사 앞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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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국의 오늘의 좌표는 무엇이며, 내일의 향방은 어디인가?

비록 오늘날 우리는 미숙한 정치와 후진성을 탈피 못한 경제상태 속에서 근대화를 부르짖은 이중구조적인 사회상황에서 허덕이고 있지만, 맑고 밝은 민주한국을 건설하려는 우리의 결의는 불퇴진이며 지상과업임을 공인하는 바이다.

우리가 알기에는 이 지상에 완성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본 적이 없었듯이, 또 긴 앞날에도 완전한 민주주의란 존재 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며, 일인이나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고, 한 겨레의 지혜와 경험의 총화로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민족의 공동광장에서 묶어진 최대공약수가 아니면 아니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무릇 인류에 관계되는 역사나 사건치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아닌 것이 있을 수 없겠으나, 민주주의는 더욱이 인간관계에 예민한 정치제도라 할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링컨대통령이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치'라고 한 것은 너무도 적절한 표현이며, 얼마나 인간관계를 중요시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제주의, 독재주의는 종속적인 인간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 치자와 피치자와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설정한다. 그리고 스스로 신격화하여 민중의 우상으로 자처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인 인간관계는 이러한 종속관계를 그 자체의 생리상 본질적으로 배격하며, 치자와 피치자와의 대립적인 이원적 존재는 이 양자의 동일성으로 지양됨으로써 횡적인 인간과계, 즉 평등한 인간관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치자와 피치자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다 같은 광장 위에서 서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가 일단의 정치인이나 소수의 관리 혹은 재벌들에 의해서 무너져 버리면, 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부패된 관료주의나, 과도정치나, 다수를 빙자하는 소수의 횡포로 전락하게 마련인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체로 선택하고 이것을 확립하여야 하겠다는 의지는 결코 국가만을 위하거나 내가 포함하여 있지 않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국가·민족보다도 (나)에게 가장 유리하고 창의적인 나로 생동할 수 있는 분위기 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전제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정치적 동토 속에서 '나'를 상실하고 개성의 창의성이 부정되는데 비하여 얼마나 행복한 정치제도인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잡지 창간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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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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