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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차를 뽑은 지 겨우 한 달.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친구와의 반가운 재회는 불쑥 찾아온 사고와 뒤엉킨 수사 과정 때문에 어수선하게 끊기고 말았다.

사람을 만날 땐 전화기를 멀리 치워두는 편이다. 그것이 마주 앉은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믿기 때문이다. 친구와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자식들의 혼사를 이야기 하는 동안, 내 전화기는 테이블 구석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일정이 빠듯한 친구와 서둘러 카페를 나선 뒤에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두 통, 그리고 문자가 와 있었다. 현장 사진까지 정성껏 첨부되어 있었다. 찌그러진 새 차의 범퍼를 확인하는 순간, 짧았던 재회의 여운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시민의 선의 부재중 전화 두 통 끝에 도착해 있던 문자 한 통. 금 간 액정 위로, 이름 모를 시민의 선의가 떠 있었다.
▲시민의 선의부재중 전화 두 통 끝에 도착해 있던 문자 한 통. 금 간 액정 위로, 이름 모를 시민의 선의가 떠 있었다. ⓒ 생성형 AI

친구를 목적지까지 바래다주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따뜻한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채 서둘러 헤어졌다. 범퍼에 남은 흠집은 단순한 물리적 충격이 아니었다. 도주한 운전자가 길바닥에 내팽개치고 간 '비양심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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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은 무더위보다 성가셨다. 112 신고를 하고 경찰서에 찾아가 조사를 받았다. 학교로 돌아와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해 제출하고, 밀린 업무를 처리하던 중 "가해 운전자가 범행을 부인하니 차량을 대조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씁쓸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잘못은 다른 사람이 저질렀다. 그런데 왜 비틀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피해자인 내가 소중한 일상을 쪼개며 피해를 '증명'해야 하지?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때로 무고한 이들의 시간과 수고를 너무나 당연하게 담보로 요구한다. 썩 유쾌하지 않은 사회적 비용 지불이다.

그러나 이 번거로운 절차를 밟는 내내 마음 한구석을 지탱해 준 것은 제보자의 문자였다. 가해 운전자의 양심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제보한 시민은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카메라를 들었다. 그 사소하지만 단단한 선의가 없었다면 나는 억울함조차 증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찰서에서 만난 가해자는 끝내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블랙박스에 담긴 정황은 그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경찰관은 줄자를 이용해 내 차의 스크래치 위치를 확인하고, 상대 차량에서 그와 일치하는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처음에는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 블랙박스 영상 속에는 도주 차량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정작 확실한 물증이 없다니 답답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격자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관과 직접 통화해달라고 부탁했다.

경찰관이 전해준 목격자의 통화 내용은 결정적이었다. 사고 순간 선명하게 '꽝' 소리가 났으며 명백하게 해당 차량이 치고 그냥 갔다는 증언이었다. 경찰관은 그 정도 소음이 났다면 단단한 번호판 부위로 충격했을 것이라 추론했다.

놀랍게도 상대 차량 번호판의 세로 높이와 내 차의 찍힌 두 부위가 정확히 일치했고, 번호판에 남은 미세한 스크래치까지 확인해 냈다. 그제야 양쪽 보험사가 호출되었고, 상황은 마침내 상대방 100% 과실로 명쾌하게 정리되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시민이었다. 그저 지나가다 놀라 돌아봤을 뿐인 이가 굳이 시간을 들여 번호판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고, 낯선 번호로 문자를 남겨주었다. 나아가 번거로운 경찰 증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목격자 한 사람의 수고로운 걸음이 없었다면, 이 사건은 정황과 오리발 사이에서 흐지부지 묻혔을지도 모른다.

법과 경찰이 작동하기 전, 파괴된 공동체의 신뢰를 먼저 다잡은 것은 제보자의 작은 눈과 손이었다. 가해자의 도주한 양심에 씁쓸해하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이 사회를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도망친 양심보다 더 무겁게 제자리를 지켜내는 '보통 시민들의 선의'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씁쓸하게 시작했던 경찰서 길 끝에서, 나는 아직 이 사회가 서로를 믿고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작은 온기를 안고 집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물피도주#목격자#시민의식#자동차사고#블랙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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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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