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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두 번의 계절을 건너며 두 딸을 차례로 시집보냈다. 봄에는 큰딸을, 여름의 문턱에서는 작은딸을 보냈다. 예식장 거울 앞,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가슴 한켠이 저릿해지면서도 허전했다. 이제는 내 딸이 먼 길 떠나는 것 같았다.
한 지붕 아래 살 때는 마주치는 게 당연했으나, 각자의 살림을 차리고 나니 일정을 맞춰야만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별한 날 아니면 좀처럼 얼굴 볼 일이 없다. 그래서 이번 8월 16일과 17일, 일요일과 광복절 대체공휴일을 이어 붙여 춘천으로 1박 2일 여행을 잡았다. 두 딸 내외와 우리 부부, 여섯 식구가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평일이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모두 직장인이니까. 이틀 연달아 쉴 수 있는 날을 찾느라 몇 주 전부터 가족 대화방에서 일정을 맞췄다. 예전 같으면 '이번 주말 어디 갈까' 한마디면 끝났을 일을, 이제는 여섯 명의 바쁜 일정을 헤아려야 한다. 가족이 크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가까이 사는 작은딸 내외와 먼저 출발했다. 큰딸 내외와는 가평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고속도로는 차들로 제법 밀렸다. 막바지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었다.
가는 길에 비가 살짝 흩뿌렸다. 골짜기를 미처 넘지 못한 구름이 산자락에 걸려 물안개로 피어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내 귀에 아내가 틀어둔 클래식 선율이 스며들었다. 문득 미안한 생각이 스쳤다. 아내와 나는 수십 년을 같은 교직에 몸담았으면서도, 방학 한 번을 온전히 함께 보낸 적이 드물었다. 나는 방학 중에도 학교 문을 열고 닫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아내는 그 시간을 혼자 견디며 저 음악으로 외로움을 달랬을지 모른다.
휴게소 주차장에서 울려 퍼지는 주차 관리원의 호각 소리. 평소였다면 설렘의 소리였을 텐데, 그날은 무거운 노동의 숨결 같았다. 젖은 바닥 위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 초원목장에 도착했다. 푸른 언덕과 여유롭게 풀을 뜯는 동물들. 비 갠 맑은 하늘 아래 웃음 짓는 가족들. 기쁨과 노동, 평화와 고단함이 한순간에 교차했다.
"열이 되면 금상첨화" 바람과 현실 사이
해피초원목장은 캐나다 밴프가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내는 걸음마다 "좋다"를 연발했다. 넷이던 식구가 여섯이 된 흐뭇함이 그 말에 묻어났다. 아이들 뒤를 걷던 아내가 문득 속삭였다.
"딸들이 둘씩만 낳아준다면 우리 식구가 모두 열이 될 텐데, 그러면 금상첨화 아니겠어."
저 앞서가는 두 딸 내외가 들을세라 조심스러운 눈치를 살폈다.
춘천은 역시 닭갈비다. 아이들이 미리 검색해 둔 유명한 집을 찾아갔지만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저희들끼리였다면 기꺼이 그 줄에 섰을 아이들이 부모를 생각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명성 높은 맛보다 주인장이 여유롭게 지어 보이는 미소가 더 맛깔스럽다는 게 우리 부부의 오랜 생각인데, 아이들도 그 마음을 알아준 셈이었다. 우리는 기다림 없이 맛있게 닭갈비를 먹었다.
식사 후 찾은 카페 근처는 길가 여기저기 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다들 근처 땅에 편하게 차를 대는 눈치였지만, 남의 땅에 함부로 들어설 마음이 나지 않아 결국 편의점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런데 그 편의점에도 춘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었다.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들고 그 테라스에 앉아 저물어가는 시내를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숙소에서 삼겹살을 굽고 술잔이 돌자, 아이들은 낮 동안 숨겼던 속내를 꺼냈다. 큰딸이 씁쓸하게 말했다.
"정부 정책은 대기업과 공공기관 위주예요. 내 현실과는 너무 달라요. 육아휴직을 쓰면 자리가 보장되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였다.
"아빠, 아이를 낳으려면 10년간 쌓은 경력을 버리고 대기업으로 이직해야 해요. 이게 말이 돼요?"
작은딸 내외는 서울 근교에 신혼집을 냈다. 두 사람 월급과 대출로도 서울에서 아이 키울 집 구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지역을 넓혀 알아보고 있다. 작은사위가 말했다.
"13평 빌라 전세금이면 대전에서는 아이 키우기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어요."
전문 자격증과 안정된 직장도 서울 집값 앞에서는 무력했다. 나는 그 현실을 밥상머리에서 목격했다.
나는 34년간, 학생들에게 늘 "너희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나아질 거다"라는 말을, 확신은 없어도 희망만은 잃지 않으려 애쓰며 해왔다.
정작 내 딸들이 학교 담장 밖에서 마주한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딸들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무력감이 뒤섞여 있었다. 이게 지금 이 나라 청년들이 결혼 후 마주하는 가장 보통의 고민이라는 걸, 나는 딸들과 사위들의 입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낮에 초원에서 아내가 "열이 되면 금상첨화"라며 웃던 바람과 아이들이 마주한 현실 사이에는 우리가 쉽게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남이섬에서 만난 두 개의 손
이튿날 찾은 남이섬, 잣나무와 메타세쿼이아 사이 숲길을 걷다 종신직원 안내판 앞에 발걸음이 멈췄다. 남이섬에서 태어나 유원지 시절부터 이 섬에서 일해온 어르신이었다. 2012년, 74세의 나이에 종신직원으로 선정되어 지금도 청소와 재활용 업무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고 했다. 여든 넘은 나이까지 일해야만 하는 노인 빈곤의 증언일까, 일자리를 지켜주는 업주의 관대함일까. 나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가평휴게소에서 자동차를 안내하던 손과 여든이 넘어 섬을 쓸고 닦는 어르신의 손이 겹쳐졌다. 둘 다 몸으로, 손끝으로 하는 노동이었다.
인공지능이 사무직마저 대체한다는 시대에도, 차를 안내하는 손과 섬을 가꾸는 손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대체되지 않는 노동이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 노동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 생각은 곧 어젯밤 작은사위의 얼굴로 이어졌다. 서른의 사위는 서울 한복판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연고 없는 지방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여든을 넘은 어르신은 한 섬에서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는데 말이다. 무엇이 더 단단한 삶인지, 나는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남이섬을 나서며 깨달았다. 자식을 키워 독립시킨다는 것은 품에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광야를 향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걷는 법을 배우는 일임을.

▲섬 숲길나무들은 가지 끝에서 서로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둔다 ⓒ 오성훈
숲의 나무들은 위로 가지를 뻗다가도 이웃한 나무와 일정한 간격을 둔다.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 틈으로 햇빛을 나누어 또 다른 생명을 숨 쉬게 하기 위해서다. '수관기피'라는 불리는 이 현상처럼, 우리 가족도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둔다.
부모라고 딸의 이직을 대신해줄 수도, 서른 사위의 서울살이를 지켜줄 수도 없었다. 그저 곁에 서 있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벌써 다음 여행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거리를 두되 끊어지지 않는 것, 그 따뜻한 거리가 우리 여섯이 함께 지어갈 숲의 모양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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