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장에게 건네는 종이 한 장. 어느 학교는 그것을 '당선증'이라 부르고, 어느 학교는 '임명장'이라 부른다. 지난 기사에서 나는 이 사소해 보이는 이름 하나에 학생 자치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이 숨어 있다고 썼다. (관련 기사 :
왜 당선증이 아닌 임명장일까, 교장인 나도 뜨끔했다 https://omn.kr/2jhvl)
그 기사가 나간 날, 나는 교장단 단톡방에 기사 링크를 올렸다. 학생회장에게 주는 그 종이를 각 학교는 뭐라고 부르는지, 기사를 쓰며 처음 물었던 바로 그 방이었다. 그때 돌아온 답은 모두 '임명장'이었다.
"관행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 나가는 오 교장님, 멋집니다."
첫 반응은 따뜻했다. 그런데 몇 분 뒤, A 교장의 긴 메시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의 반론은 단순한 원칙론이 아니라, 오랜 학교 행정 경험 속에서 벼려진 것이었다.
"오 교장님,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학생들을 민주 시민이자 자치 활동의 주체로 바라보고 그 의미를 살리고자 '당선증'을 제안한 점은 정말 뜻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기사와 관련해 관련 법령을 함께 고려하면서 몇 가지 현실적·제도적 부분에 대해 제 의견을 드립니다."
문장은 정중했으나 논지는 분명했다. 그의 반론은 크게 두 가지였다. "당선증은 선거를 직접 주관하고 관리한 학생자치회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발급하는 것이 맞습니다." 수여 주체가 다르다는 것, 학교장 명의로 낸다면 그 구분부터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첫째였다.
이어진 두 번째 논지는 더 단단했다. 그가 근거로 든 것은 초·중등교육법 제20조, 교장이 교무를 총괄하고 학생을 교육한다고 정한 조항이었다. 그러니 임명장은 투표 결과를 뒤집는 권력 행사가 아니라, 이미 당선된 학생에게 대표의 지위와 임무를 공식적으로 부여하는 절차라는 것이었다.
지난 기사에서 나는 두 단어를 반대 방향의 화살표로 그렸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임명',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당선'. 하지만 A 교장은 두 화살표를 하나의 직선 위에 나란히 놓았다. '당선'이라는 민주적 사실이 먼저 있고, '임명'이라는 행정적 절차가 뒤를 잇는다는 논리였다. 반박할 말을 찾기 전에 선선한 인정이 먼저 찾아왔다.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
초·중등교육법에 기반한 절차의 정당성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만 절차의 엄밀함과 상징이 지향하는 바는 서 있는 층위가 달랐다. A 교장이 "권한을 누가 부여하는가"라는 행정의 절차를 물었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라는 교육의 상징을 물었던 셈이다.
같은 시, 정반대의 독법
A 교장은 김춘수의 시 〈꽃〉을 인용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이름을 짓는 일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므로 신중해야 하며, '임명장'이라는 명칭 역시 앞선 이들이 고민 끝에 선택한 신중한 결과였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문득 나 역시 지난날 '이름의 예의'에 대해 썼던 기사들이 떠올랐다. '특성화고' 대신 '직업계고'라는 정체성을 찾아주자고(관련 기사 :
'마이스터고'는 '특성화고'와 다른데... 교육청·언론에 실망 https://omn.kr/2hrpv), 학교 교육에서 '노동'이라는 진짜 이름을 지우지 말자고(관련 기사 :
울산시의회는 왜 '노동'을 지우려 하는가 https://omn.kr/2gxdp) 목소리를 높였던 기억들 말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나 역시 같은 시를 떠올렸다는 사실이다. 다만 시선이 향한 방향이 달랐다. 나는 그 시를 '존재의 본질에 맞는 새 이름을 찾아주자'는 변화의 당위로 읽었고, A 교장은 '오래 얹혀온 이름의 무게를 경솔히 지우지 말자'는 존중의 당위로 읽었다. 한 송이의 같은 꽃이, 서로 다른 신념의 토양에서 피어난 셈이다.
단어는 스스로 뜻을 고정하지 않는다. 그 단어를 붙잡은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비로소 의미를 완성한다. A 교장과 나는 같은 텍스트를 읽고 있었지만 서 있는 자리가 달랐다. 적어도 우리는 감정을 해치지 않은 채로, 서로가 선 자리를 있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규정은 답을 비워두었다
내심 매끄러운 결론을 내리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초·중등교육법과 시행령, 교육청 지침과 우리 학교 학칙을 차례로 다시 훑어보았다. 초·중등교육법 제17조는 "학생의 자치활동은 권장·보호되며, 그 조직과 운영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학칙으로 정한다"고만 밝히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대표 학생에게 건네는 종이의 정확한 명칭을 지정한 조항은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정답을 맞히는 퀴즈가 아니었다. 각 학교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남겨진 자리였다. 나는 여전히 '당선증'이 낫다고 믿는다. 학생 자치의 출발점이 표에 있었다는 사실을, 종이 한 장이 해마다 다시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A 교장은 여전히 절차와 명칭의 엄밀함이 먼저라고 믿을 것이다. 규정이 답을 비워둔 자리에서, 두 믿음은 각자의 근거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가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상급 기관이 지침을 내려 "당선증으로 통일하라"고 했다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관성을 또 다른 관성으로 바꿀 뿐이다. 핵심은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왜 그것을 쓰는가'를 스스로 묻는 데 있다. 종이 한 장의 이름조차 획일적인 지침으로 단칼에 베어내지 않은 그 여백, 그것이야말로 우리 교육이 지켜내야 할 진짜 '자치의 여백'이 아닐까.
그래서 이제 나는 다른 학교에 '당선증'을 쓰라고 권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당신의 학교는 학생 자치를 어떤 장면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은지, 그 답을 이 종이 한 장의 이름에 스스로 새겨보라고.
이 소동의 첫 화두를 건네준 지인에게도 기사 링크를 보냈다. 돌아온 답은 짧고 담백했다.
"기사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 짧고 담백한 문장 앞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루 전 그의 중학생 아들이 무심히 던진 한마디, "왜 당선증이 아니고 임명장이에요?"는 그사이 여러 학교 교장들 사이를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질문은 아이의 무심한 입에서 태어나 어른들의 세계를 한 바퀴 크게 돌았지만, 처음 출발했던 자리로 성급히 돌아가지 않았다.
교장들의 답은 끝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단칼에 베어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생각이 다른 어른들도 서로를 존중하며 성급한 합의를 강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아이가 마주할 가장 생생한 민주주의 수업은 아마 그 장면, 완성된 정답이 아니라 다투고 조율하는 과정 그 자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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