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성 장애가 있는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발 떨지 말고, 말 반복하지만 않으면 완벽하다는 말을 늘 듣고 살았다. 그래서 완벽해지려고 했지만, 말 반복이나 발을 떠는 걸 없애는 게 쉽지 않았고 좌절을 느꼈다. 하지만,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면서 장애란 회복되거나 극복되는 게 아님을 알게 됐다. 또한, 자폐성 장애인들끼리 모인 자조모임에서는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진실을 재차 확인함은 물론 각 개인의 경험을 솔직하게 공유하며 공감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자폐인인 나로선 긍지와 자존감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나의 특성이 신경다양성의 일부이며 다름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을 때는 기쁘기까지 했다. 그런데, 신경다양성과 관련해 사회는 여전히 장애 치료와 극복 중심의 서사, 능력주의를 통한 사회 적응만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보도되고 있는 신경다양성 담론들은 이런 한계들을 드러낸다. 일례로 최근 MBC 뉴스투데이에 출연한 박수현 행동분석가는 인터뷰에서 신경다양성을 '자폐 스펙트럼, ADHD, 난독증 등의 장애 영역을 뇌의 신경학적 차이이자,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 강점에 중점을 두는 관점'이라 설명하며, 자녀의 자폐 진단을 계기로 응용 행동 분석(ABA)을 공부하면서 신경다양성 관점에 공감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에서 자녀 양육과 치료 책임을 오롯이 부모가 지는 현실을 지적하며, 자신이 경험한 미국의 사례처럼 발달장애 가족 마음을 세심히 살피는 공적 지원체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신경다양인은 "사회적 맥락과 규칙 적응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신경다양성 다섯 글자가 조금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발달장애 가족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다정함과 따뜻함이 깃드는 그런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며 인터뷰를 종결했다.
장애가 있는 자녀 양육은 부모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국가가 일정 부분 예산과 제도로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팽배해 있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인터뷰한 부모의 마음에 동의를 보낼 것이다. 자폐성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많은 현실도 생각하면, 사회에 따뜻한 시선을 바란다는 인터뷰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고충을 우선적으로 내세운 이러한 서사 속엔 당사자의 주체성이란 신경다양성 담론의 핵심이 생략돼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정 개인의 발언에 대한 이의 제기를 넘어,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자칭 '신경다양성 담론'의 한계를 짚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해 신경다양성을 운동적, 학문적으로 정립하고자 시도했던 닉 워커(Nick Walker)와 데미안 밀튼(Damian Milton)의 관점들부터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학자들의 관점으로 드러난 담론의 한계
먼저 닉 워커는 자신의 논문인 신경다양성: 몇 가지 기본용어 및 정의(관련 자료:
NEURODIVERSITY: SOME BASIC TERMS & DEFINITIONS)에서 신경다양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신경다양성을 단지 '생물학적 사실'일 뿐이며 개인 소유의 특성이 아닌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경다양성' 관련 개념을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한다. 세상에 '단 하나의 완벽하고 정상적인 뇌'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당연하다고 보는 '정상적인 뇌'의 기준은 사실 주류 기득권이 창조한 틀에 불과하다. 이 틀 - 즉 무엇이 정상이고 어떤 것이 바른 것인지 하나의 사회적 기준을 정하고 압박하는 신경규범성(Neuronormativity) - 에 맞지 않아 사람들을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고, 고치려 하는 게 부당하다는 거다. 따라서 신경다양성 운동이란 개인의 독특한 개성 존중 차원 너머로 획일적 기준을 강요하는 사회구조를 바꾸자는 시민권 운동이라는 것이다.

▲데미안 밀튼의 이중 공감 문제(Double Empathy Problem) 이론 도식화. 자폐인(왼쪽)이 비자폐인의 행간을 읽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비자폐인(오른쪽) 역시 자폐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소통의 어려움은 일방의 문제가 아닌 양방향 문제임을 보여준다. ⓒ Frontiers for Young Minds
데미안 밀튼은 이중 공감 문제(Double Empathy Problem)란 이론을 정립했다. 종종 '자폐인의 결함'이 자폐인이 경험하는 소통의 어려움의 원인이라고 사회는 여긴다. 하지만 이 이론에서는 소통의 어려움은 자폐인의 결함이 아닌 서로 다른 언어와 방식을 지닌 두 문화권의 사람이 만날 때 발생하는 오해라는 것이다(관련 자료:
이중 공감: 자폐인이 종종 오해받는 이유(Double Empathy: Why Autistic People Are Often Misunderstood)). 마치 한국인과 외국인이 서로의 언어와 맥락을 몰라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비자폐인 역시 자폐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책임을 자폐인에게만 전가하고 있음을 이 이론에서는 지적한다.
신경다양성과 관련된 이 두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방금 전의 인터뷰에서 나오는 시각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신경다양인은 '사회적 맥락과 규칙 적응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들이 적응하기까지 다정하게 기다리는 분위기가 필요'하고, '발달장애 가족을 향한 따뜻함이 사회에 깃들기를 바란다'는 인터뷰 내용이 있었다. 여기서 '다정한 기다림'이란 사실 비자폐인의 사회적 맥락과 규칙을 '정상'이라 전제하고 자폐인은 그 '정상'에 적응해야 하는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비자폐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을 억지로 고치게 만드는 강요인 규범적 교정(Normative Remediation)의 시각으로도 볼 수 있다. 자폐인 혼자만의 결함이 아닌 자폐인과 비자폐인 양측이 함께 풀 구조적 관계가 소통의 불통을 해결한다는 데미안 밀튼의 관점과는 배치될 수 있고, 신경다양성 담론에서 중심축 중 하나로 나서야 할 자폐인의 주체성을 거세할 위험이 있다.
우리 사회는 눈치를 강요하는 고맥락 사회이기에, 사회의 적응 요구는 가혹할 정도다. 자폐 특성을 드러내면 직장, 학교 등지에서 배제를 심하게 겪기에 자폐인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감추는 마스킹(Masking)을 강요받고,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규칙과 맥락에 적응하느라 안간힘을 쓰지만, 이로 인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신적 소진을 심하게 겪는다.
신경다양성을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 강점에 중점을 두는 관점'이라 설명한 것 또한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권력 관계의 해체라는 정치적 성격을 가리고, 이를 개인의 특성이나 능력 발휘로만 치환하는 '탈정치화' 함정에 빠질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에는 '자본주의 시장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유능한 신경다양인'만 사회가 수용하겠다는 위험한 신호가 숨어있을 수 있다고 본다. 생산성이란 잣대로 지원 욕구가 큰 중증 지적·자폐성·심리사회적 장애인을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하는 능력주의 강화의 빌미가 될 수 있다. 무능력과 다름조차 온전한 다양성으로 보지 않는다면 어찌 이를 진정한 신경다양성이라 부를 수 있는가?
또한 한국에서 자녀 양육과 치료 책임을 오롯이 부모가 지는 현실을 지적하며, 미국의 사례를 들어, 국가의 돌봄 지원을 주장하는 것에는 그 자체로 타당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과정이 자칫 당사자를 동등한 '권리 주체'가 아닌 오롯이 자기결정권이 박탈된 관리와 통제의 대상, 혹은 시혜의 객체로만 호명하는 방식으로 소비될 우려가 있다.
이런 시각은 당사자가 언어, 몸짓, 손짓, 발짓 등을 활용하고, 어떻게 삶을 살아나갈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자기결정권이 박탈되는 요인이 된다. 표준화된 언어로 지원 욕구가 큰 중증 정신적 장애인들의 욕구와 선호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자기결정권을 빼앗으며, 이들을 성년후견 제도의 그늘로 전락시키는 게 현재 한국사회의 가혹한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자폐인,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가 있는 사람 등 주류사회가 정해놓은 신경유형에서 벗어난 신경다이버전트(Neurodivergent, 신경발산)한 사람들의 완전한 시민권과 평등을 요구하는 신경다양성 운동의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거다.

▲자폐 예술로 인간 마음의 자연적 다양성을 묘사한 그림 ⓒ MissLunaRose/위키미디어 공용
신경규범성의 폭력성이 빠진 신경다양성 담론을 거부한다
한국사회에서 비장애 중심의 신경규범성(Neuronormativity)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성을 논의하지 않고 있다. 이를 해체하지 않은 채 신경다양성 담론을 펼친다는 게 지금의 신경다양성의 개념과 본래 의도가 왜곡되고 오용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고 있다.
그러니 결론은 간단하다. 진정한 신경다양성이란 개인의 특성과 강점을 선별적으로 정의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비장애 중심의 신경규범성이 보여주는 구조적 폭력을 직시하며 이를 해체하는 실천 속에 신경다양성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이런 전환은 성격장애인, ADHD가 있는 사람, 경계성 지능인, 자폐인 등 신경다이버전트한 사람들이 주도해야 한다. 이들이 비장애 중심의 신경규범성을 거부하고, 이들 자신이 삶에서 나오는 경험과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정책과 사회 등에서 주류사회의 규칙에 무조건 순응해야만 참여를 허락하는 방식의 참여적 동화(Participatory Assimilation)를 멈추고 다양성을 실질적으로 존중받으며,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이 사회는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사회가 그렇게 할 때, 당사자 개개인의 욕구와 필요, 특성에 맞게 환경을 조정하는 합리적 편의와 접근성이라는 정당한 권리가 구체적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당사자를 배제한 어떤 결정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자기결정권의 원칙이자,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정신, 즉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해 말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구호가 신경다이버전트 당사자들에게 피부로 와닿을 것이다.
신경규범성의 폭력성을 직시하고 해체하는 작업, 신경다양성을 왜곡하거나 호도하지 않고, 진정으로 신경다양성을 존중하는 시작이자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