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냉동실 속 내 전용 간식이 말없이 사라진 날, 가족들의 향한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ai 생성 이미지)
▲냉동실 속 내 전용 간식이 말없이 사라진 날, 가족들의 향한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ai 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피곤한 오후, 당이 떨어질 때 가끔 찾는 바닐라라테를 빼면 나는 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스크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냉동실엔 늘 아이스크림이 그득하다. 아이들과 남편이 좋아하니 채워두는 거다. 다만 그중에 딱 하나, 내가 유일하게 손대는 종류가 있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그 기호를 안다. 그래서 그 아이스크림만큼은 아무도 손대지 않고 남겨둔다. 다른 것을 찾으려고 냉동실 문을 열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그 아이스크림을 보면 이게 별것 아닌데도 매번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묘하게 안심이 된달까.

지난주, 평가지를 만드느라 유난히 진이 빠졌던 날이었다. 평소보다 늦게 퇴근하고 돌아온 집. 오늘만큼은 그 아이스크림으로 하루의 피곤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냉동실 문을 열었는데,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누가 엔초 먹었어?"

AD
내 당을 단숨에 끌어올려주리라 기대했던 것이 보이지 않자, 난 갑자기 자기 아이스크림을 뺏긴 어린아이 같이 몹시 노여워졌다. 방에 있던 딸이 내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슬쩍 눈치를 보며, "어, 그거 엄마 건 줄 몰랐지" 했다. 몰랐을 리가. 아이스크림을 살 때마다 남편이 "엔초는 엄마 거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곤 하는데. 딸은 아르바이트를 다녀와서 그저 배가 고팠고, 냉동실을 열었더니 아이스크림이 있었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먹었을 뿐이라고 했다. 평소라면 이럴 애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악의라곤 없이 억울해하는 표정에 더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평소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가족들은 그 아이스크림이 딱 하나 남아 있을 때면 꼭 나한테 먼저 물어본다.

"이거 이제 하나 남았는데 먹어도 돼?"

내가 괜찮다고 하면 그제야 먹는다. 그 짧은 질문 하나에 나는 매번 마음이 놓였다.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이렇게 사소한 데서 오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이, 마지막 하나가 그냥 사라져 있었다. 그깟 아이스크림 한 개 아니냐고, 그거 하나로 서운해하는 내가 옹졸한 걸까 싶다가도, 서운함이라는 감정은 이성적인 판단에서 오는 게 아니어서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가족이라는 관계는 이런 식의 침범을 유독 관대하게 봐주는 곳이다. 남의 자리, 남의 물건, 남의 시간에는 절대 함부로 손대지 않으면서, 식구끼리는 "이 정도쯤이야" 하며 선을 슬쩍 넘는다. 방문을 노크 없이 열고, 옷장 속 옷을 말없이 꺼내 입고, 냉장고 안의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자기 것처럼 소비한다. 친밀함이 허락의 근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덜 차려도 된다는 착각. 그 착각이 반복되다 보면 누군가는 매번 자기 몫을 조용히 양보하는 사람이 되고, 그 양보가 당연해진 자리엔 서운함이 차곡차곡 쌓인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당신이 옳다>에서, 국경이 나라 사이를 나누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경계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사람 사이의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지키는 일이 어렵다는 것. 게다가 그 경계를 가장 쉽게, 가장 자주 침범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가족이라고 그는 짚는다. 남에게는 웬만해선 하지 않을 일을, 가족에게는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로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침범한 쪽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모르고, 침범당한 쪽은 왜 이렇게 서운한지 설명하기도 애매한 채 조금씩 마음이 상해 간다.

냉동실 앞에서 느낀 그 모호한 서운함의 정체가, 이 책의 문장을 읽고 나서야 조금 선명해졌다.

평소 가족들이 매번 마지막 하나 앞에서 내게 묻던 그 질문이, 사실은 대단한 배려였구나 싶다. 물어봐 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그땐 미처 하지 못했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느라, 정작 그 당연함을 만들어낸 마음은 놓치고 있었던 거다.

딸에게는 그날 밤, 화내지 않고 그냥 이야기했다.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안 좋아한다고 해서 못 먹는 건 아니야. 엄마가 좋아하는 게 그거 딱 하나뿐이라, 그것만은 안 건드려줬으면 해."

딸이 머쓱하게 웃으며 "아, 몰랐어. 이제 물어볼게" 한다. 별것 아닌 약속이지만, 이 작은 약속 하나가 지켜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내 자리가 지켜지는 느낌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기호와 영역을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가장 자주 상처받는 사람이 된다. 사랑이 넘친다고 선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그 선을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오래도록 서운함 없이 곁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딸, 다음번엔 꼭 먼저 물어봐 줘. 그러면, 엄마는 언제나 흔쾌히 "그래, 먹어" 할 거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가족#아이스크림#선호하는것#선지키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
정혜영 (hyoung47) 내방

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