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슬라이드는 한 장도 넘기지 않았다. 지난 5일 토요일 오전, 서울로봇고 메이커랩. 학교장인 내가 준비한 강의 제목은 '피지컬 AI 시대, 내 아이의 진로는?'이었지만 화면은 끝까지 어두웠다. 그 자리를 학부모 다섯 분의 질문이 다 채웠기 때문이다.
서울로봇고를 비롯한 강남의 직업계고는 강남구청 지원으로 주말에 소규모 원데이 클래스를 회차별로 운영한다. 우리 학교는 그 수업이 열리는 공간을 메이커랩이라 부른다. 관내 중학생에게는 DIY(Do It Yourself), 주민에게는 DIP(Do It Parents) 프로그램을 연다. DIP는 학교가 DIY에 맞춰 붙인 이름이다. 강남구 학생과 주민을 우선하지만 자리가 남으면 다른 지역에서도 신청할 수 있다.
이전 회차의 강의실 풍경은 사뭇 달랐다. 로봇 기술이 알고 싶어 찾아온 지역 주민, 아직 진학이 먼 초등학생 학부모가 섞여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준비한 슬라이드가 제 역할을 한다. 이번에도 같은 제목으로 슬라이드를 준비해 간 이유였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만들 미래를 들여다보며 아이의 진로를 고민하게 하는 순서였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이날 질문하신 학부모 5분은 모두 중학교 3학년 자녀를 두었고, 모두 우리 학교 지원을 앞두고 있었다. 마이스터고 원서 접수가 오는 10월 19일부터라 이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첫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질문이 먼저 날아왔다. 슬라이드를 넘길 틈이 없었고, 넘길 이유도 없었다. 준비한 순서를 따라가는 것보다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날의 진로 특강에 더 맞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성적표가 말해주지 않는 것
강남은 사교육 1번지이자 시험능력주의의 공고한 탑이 서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다섯 분은 그 거대한 대열에서 반 발짝 비켜서 있는 이들이었다. 자녀의 성적이 학원가가 요구하는 숨 가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중학교까지는 배정받은 학교에 묵묵히 다니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라는 문턱 앞에서 처음으로 '선택'이라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 그 기준이 아이의 적성이 아니라 성적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로봇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는데, 정말 잘 적응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의 이면에는 '내 아이 성적으로 일반계고 가면 실패가 뻔히 보여서 여기 보내고 싶은데, 이 선택이 과연 맞는 걸까요?'라는 더 무겁고 서글픈 질문이 숨어 있을 것이다. 성적이라는 일방적인 줄 세우기가 아이들의 가능성을 미리 재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교육이 벌려 놓은 격차를 학교 시험이 숫자로 도장을 찍고, 그 등수가 곧장 진로의 종착지가 되어버리는 구조다. 성적이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이나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저마다의 빛깔이 다른 '차이'일 뿐인데, 우리 교육은 그 다름을 기어이 '서열'과 '차별'로 바꾸어 읽고야 만다. 그러나 성적표는 아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려줄 뿐, 3년 뒤에 어디에 서 있을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 학교 2026년 2월 졸업생 120명 중 98명이 취업했다(4월 1일 기준, 학교 자체 집계). 열 명 중 여덟 명이다. 이 아이들이 입학할 때 가져온 중학교 내신의 평균은 중간보다 조금 낮았다. 강남 학원가의 기준으로 보면 '뒤처진' 성적이다. 한 학교의 한 해 기록이니 이것으로 무엇을 증명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입학 성적으로 이 결과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적어둔다. 일학습병행제로 29명, 조기취업형 계약학과로 14명, 공기업과 공무원, 대기업으로 17명이 갔다. 나머지는 로봇 관련 중소·중견기업 현장에 자리를 잡았고, 부사관이나 전문특기병으로 군에서 기술 경력을 시작한 아이들도 있다.
아픈 기록도 함께 적는다. 이 졸업생들은 3년 전 144명으로 입학했다. 3년 사이 24명이 학교를 떠났다. 대부분은 전공이 자신과 맞지 않아 다른 길을 찾아 떠났고, 일부는 수능으로 대학에 가겠다며 일반고로 전학하거나 자퇴를 택했다.
앞의 선택은 우리가 입학 전에 더 정확히 알려주지 못한 몫이고, 뒤의 선택은 아이가 스스로 고쳐 그린 지도라고 생각한다. 입학 인원을 기준으로 다시 계산하면 취업자는 열 명 중 일곱 명이다. 이 길이 모든 아이에게 맞다고는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날 학부모들에게도 이 숫자를 먼저 말했다.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성적이 오른 것은 아니다. 아이가 잘하는 것을 배울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졸업과 동시에 삼성전자에 입사할 예정인 3학년 한 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중학교 때 중위권이었지만 좋아하는 로봇을 공부하니 고등학교에서 상위 30%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학생이 뽑힌 '삼성전자 마이스터고 장학생'은 삼성전자가 전국 마이스터고 재학생 가운데 우수 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원하고 졸업 후 채용까지 연계하는 제도다. 1학년 성적이 상위 30% 안에 들어야 지원할 수 있고, 서류와 면접 등 회사 전형을 거쳐 2학년 진급 무렵 선발된다. 선발되면 졸업까지 매년 250만 원의 장학금을 받고, 방학마다 회사 연수원에서 2주간 교육을 받는다. 졸업할 때까지 상위 30%를 유지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졸업과 동시에 입사한다.
물론 이 길에도 다시 성적이 등장한다. 다만 중학교의 등수가 아이가 고르지 않은 과목으로 매겨진 것이었다면, 여기서의 30%는 아이가 스스로 택한 분야에서 겨루는 기준이다. 그 차이가 아이의 표정을 바꾼다.
졸업 이후 열리는 세 개의 문
마침 이날 학부모들이 물은 것이 일학습병행제와 조기취업형 계약학과를 택한 그 43명의 길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몇 해 뒤에 열리는 세 번째 문까지 이어졌다.
"일학습병행제와 조기취업형 계약학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정말 대학은 갈 수 있을까요?"
부모라면 당연히 품게 되는 불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법령상 특수목적고등학교인 마이스터고는 조기 취업과 기술 명장 육성을 목표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일반고처럼 수능 준비를 병행하기가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 매년 우리 학교에서도 5명 내외가 스스로 수능을 준비해 응시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선취업 후학습'이라는 다른 길을 택한다.
그 대표적인 경로가 바로 '조기취업형 계약학과'와 '일학습병행제' 그리고 '재직자 특별전형'이다.
조기취업형 계약학과는 입학과 동시에 협약 기업 채용이 확정되는 3년제 학사 과정이다. 1학년 1학기에는 신입생 전원이 한국장학재단 희망사다리 Ⅰ유형으로 등록금 전액을 지원 받고, 2학기는 직전 학기 성적이 70점(100점 만점) 이상이어야 지원이 이어진다. 직무기초교육을 이수하면 학기당 200만 원의 취·창업지원금도 받는다. 2, 3학년 등록금은 채용 기업이 절반을 부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대신 장학금 수혜 학기에 비례한 의무 근무 기간이 있고, 중도에 포기하면 받은 장학금을 반환해야 한다. 다만 채용 유형과 지원 규모는 대학·기업·연도별로 달라 반드시 해당 대학 모집요강을 확인해야 한다. 협약 기업이 병역지정업체라면 산업기능요원(현역 편입 34개월)으로 복무하며 경력을 이어가는 길도 있다. 다만 인원은 기업 단위로 배정되므로 개인의 자동 배정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학습병행제는 처음부터 '일터'가 중심이다. 채용 즉시 기업현장에서 선배(기업현장교사)로부터 실무 노하우를 전수받는 현장훈련(OJT)을 소화하고, 주말이나 금요일 오후를 이용해 인근 대학(공동훈련센터)에서 이론(Off-JT)을 보충한다. 정해진 이수 과정을 마치고 평가를 통과하면, 학벌이 아닌 손끝의 실력을 보증하는 국가공인 '일학습병행자격'과 함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해당 기업의 일반 근로자로 전환된다. 다만 일학습병행제 자체가 학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학위까지 가려면 '고숙련 일학습병행(P-TECH)'처럼 대학과 연계된 과정을 택해 전문학사나 산업학사를 함께 취득하는 경로를 따로 밟아야 한다.
특성화고졸 재직자 특별전형(아래 재직자 특별전형)은 배움의 영토를 넓히는 또 하나의 길이다. 명칭에는 특성화고가 들어가지만 마이스터고 졸업자도 지원 대상이다. 산업체 근무 경력이 3년 이상이고 지원 시점에 재직 중이면, 수능 없이 학교생활기록부와 재직 경력을 바탕으로 서류·면접 전형에 지원할 수 있다. 모집 규모는 4년제 대학 기준으로 2024학년도 5130명에서 2027학년도 5883명으로 753명 늘었다. 정원 외 선발이라 일반 수험생과 경쟁하지는 않지만, 지원자들 사이의 경쟁은 있다. 서울 주요 대학은 경쟁률이 오른 반면, 대학에 따라 미충원이 생기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 ed259 on Unsplash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제도의 이름을 나열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로봇에 대한 적응은 입학해서 훌륭한 선생님들과 함께 손끝으로 배우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대학은 열아홉 살인 지금 가지 않더라도, 스무 살이 넘고 서른 살이 되어서도 언제든 더 좋은 기회로 갈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사에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그렇기에 학교가 해야 할 진짜 역할도 선명해진다. 단순히 기술의 절차를 익히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아이가 졸업한 후 3년 뒤, 5년 뒤, 나아가 기술 명장(Meister)에 이르는 길을 입학 전부터 부모와 아이에게 그려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는 법
"그런데 로봇이 유망하다는 말, 5년 뒤에도 유효할까요?"
마지막 질문이 나왔다. 요즘 학부모들은 반도체와 AI의 소란스러운 뉴스 앞에서 길을 잃는다. 반도체가 향하는 다음 목적지로 '피지컬 AI'가 꼽힌다. 휴머노이드라는 몸 위에 지능이라는 영혼을 올리는 일이다. 반도체가 세포라면 로봇은 그 세포들이 모여 살아 움직이는 몸이다. 우리 학교가 다루는 기술이 바로 이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 기술들은 시대의 기류에 따라 오르내리는 '파도'일 뿐이다. 학교는 단순히 파도를 타는 재주꾼을 길러내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 이 기술이 필요한지 묻는 눈을 함께 길러야 한다.
예측 불가능한 변화의 시대에는 단 하나의 완벽한 지도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도가 파도에 젖고 찢어지더라도, 스스로 새로운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굳건한 손을 갖는 것이다. 인생은 누군가 그려준 지도를 안전하게 따라가는 여행이 아니다. 나만의 지도를 그려가는 탐험이다.
그날 메이커랩의 화면은 끝까지 어두웠다. 내가 켜지 않았고, 켤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학부모 다섯 분이 알고 싶었던 것은 슬라이드에 담긴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세 가지 질문의 답이었다.
'잘 적응할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과, '정말 대학은 갈 수 있을까요'라는 걱정, 그리고 '5년 뒤에도 유효할까요'라는 염려는 결국 하나였다. 내 아이가 이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고 '스스로 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문이 단 하나 뿐이라고 강요하며, 맞지 않는 어색한 양복 속에 그 여린 몸을 억지로 밀어 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슬라이드 한 장 없이도 학부모들의 질문만으로 꽉 채웠던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이의 성적과 점수를 묻기 전에, 그 떨리는 마음을 먼저 물어봐 준 적이 있었느냐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