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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뒤 산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대구 간송미술관과 대구미술관은 대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찾아간 날, 꾸물꾸물하던 하늘은 기어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산 가득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그 자태는 신비롭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몽환의 세계로의 여정을 예고하는 듯했습니다. ⓒ 우현주
한창 덥던 8월의 마지막 주말, 부산 친정에 가는 길에 대구에 들렀다. 대구는 오랜만이다. 결혼 전, 마지막으로 큰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갔던 이후로 가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의 대구는 명절 때마다 가면 집에 돌아갈 시간만 기다리던 지루한 곳이었다. 다시 보는 대구는 어떤 모습일까?
일부러 대구에 들른 목적은 대구간송미술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구에 있는 간송미술관 분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분관이라면 본관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간송미술관 본관은 서울 성북구에 있다.
간송의 문화보국, 대구에서 다시 만나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간송미술관의 '간송'은 '간송 전형필'의 호에서 따왔다.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의 지킴이였다. 조선 제일의 갑부였던 간송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우리 문화재를 사들이고 지키는 데 아낌없이 썼다. 그가 사들인 문화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청자와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1 전시실대구 간송미술관 1 전시실은 상설전시실로 간송이 모은 도자기와 서화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공간에 빛나는 기둥 위에 전시품을 전시해 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우현주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하던 당시, 그가 훈민정음을 사들이기 위해 사용한 돈은 무려 1만 원이었다. 책 한 권을 위해 기와집 열 채 값을 쓴 것이다. 고려청자를 위해서는 2만 원을 지불했다. 그는 이렇게 모은 귀중한 문화재를 보관하기 위해 집을 지었고, 그곳이 바로 '보화각'이다. 보화각은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의미다. 딱 맞는 이름이다.
안타깝게도 보화각은 전시보다는 문화재의 관리와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라 일반인이 관람하기 쉽지 않다. 몇 년 전까지는 일 년에 단 두 차례만, 그것도 잠시 문을 열었다. 그나마 2022년부터 현재까지는 긴 휴관에 들어간 상태다. 지난봄, 모처럼 두 달간 잠시 문을 열었지만 예약이 꽉 차 관람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이 계속 들던 중 대구에 간송미술관 분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간송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대구에 간송미술관 분관이 있는 이유는 문화 자원의 지방 배분이라는 행정적인 이유 외에도 대구가 가진 역사적·문화적 의미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대구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근대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또 문화적으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 선생의 고향이자, 이인성·이쾌대 등 한국 근대미술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대구는 간송의 '문화보국' 정신을 이어가기에 적합한 장소다.
물안개 피어오른 미술관, 조선의 보물을 만나다
대구간송미술관을 찾아간 날, 꾸물꾸물하던 하늘은 주차장에 도착할 무렵 기어이 제법 굵은 빗발을 뿌리고 있었다. 차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미술관 뒤 대덕산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였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안개 사이로 용이 나타난다 한들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이제부터 현세를 떠나 몽환의 세계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2층 입구로 들어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1층 전시실로 내려갔다. 전시실 1·2·3과 간송의 일생을 담은 '간송의 방', 기념품숍인 '간송아트숍', '보이는 수리복원실'은 1층에, 전시실 4·5는 지하 1층에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전시실 4·5가 닫혀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이긴 했지만 비탈진 지형을 이용한 건축 설계 덕분에 외벽마다 넓은 창이 나 있었다. 이 창은 바로 바깥의 정원으로 이어져 개방감이 상당했다. 또 1층과 2층 사이에 천장이 없고 1층 중앙에 로비가 있는 형태라 탁 트여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환하고 밝은 로비에서 전시실 1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깜깜해졌다. 마치 밤이 된 듯했다. 사방이 고요하고 어두운 가운데 빛의 기둥들이 서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 기둥 하나하나 위에 작품들이 앉아 있었다. 간송이 모은 도자기였다.

▲1 전시실의 고려 청자1 전시실에서 본 청자 중 하나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청자의 푸른 빛이 더욱 신비스럽게 보입니다. ⓒ 우현주
그 조선의 보물들이 어두운 공간을 밝히며 하늘의 별처럼 아스라이 빛나고 있었다. 청자의 푸른 색감과 백자의 흰빛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사진을 찍으려 했다. 어스름한 듯, 분명한 듯, 아련한 그 빛을 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찍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찍지 않기로 했다.
벽에는 서화가 있었다. 여름을 나는 선조들의 모습과 여름의 화초, 벌레, 새들이 있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탁족을 하는 선비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청나라 사신이 그려주었다는 부채 위의 푸른 대나무가 이국적이었다. 그 시절 조선의 여름은 어떠했을까? 그림에서 생명력이 느껴졌다.
눈 속에서도 푸른 대나무,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다
별이 가득 빛나는 어두운 밤하늘 같은 전시실을 나와 맞은편 전시실로 갔다. 그곳에는 오직 한 장의 그림만이 있었다. 한 명의 여인을 담은 그림. 그 여인은 살짝 들린 저고리에 부풀어 오른 치마를 입고 얹은머리를 한 채 차분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였다.

▲미인도3 전시실의 신윤복의 미인도입니다. ⓒ 우현주
간송이 다시 찾아오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다는 혜원의 화첩, 그 작품들 가운데 가장 아꼈다는 '미인도'였다. '미인도'에는 배경이 없다. 오직 여인만이 있다. 신윤복은 그림에 수많은 여인의 모습을 담았지만, 여인 한 명만을 그린 그림은 '미인도'가 유일하다.
그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사람이었기에 조선의 천재 화가가 이처럼 한 여인의 전신을 그렸던 걸까? 간송은 살아생전 서재에 미인도를 걸어두고 늘 감상했다고 한다. 나 역시 천천히 미인과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맞은편 전시실 입구는 터널이었다. 곡면으로 된 터널 끝에는 눈 속에서도 꼿꼿이 서 있는 대나무 그림 '설죽'이 있었다. 대나무를 잘 그려 조선 3대 묵죽 화가 중 한 명으로 불리던 유덕장은 이 설죽을 한겨울이 아닌 여름에 그렸다고 한다.

▲설죽하얀 눈밭에 눈을 이고도 꽂꽂하고 푸른 대나무의 모습에서 강한 기개가 느껴집니다. ⓒ 우현주
자신의 더위를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더위를 식혀주기 위해서였을까? 곧게 뻗은 대나무 줄기와 눈을 이고도 끝이 시들지 않은 대나무의 푸른 기개가 그림 밖으로도 전해지는 듯했다. 사납지 않으면서도 고요하고 끈질기게 전해지는 강한 힘. 이것이 선조들이 대나무에서 발견한 힘이었을 것이다.
오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부산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더 머무를 수 없어 아쉬웠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바로 옆의 대구시립미술관도 함께 들러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대구의 근대 역사 자취도 둘러보았을 것이다.
미술관은 좋았지만 미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았던 첫 대구간송미술관 방문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떠나는 순간, 이미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벌써 그 '다음'이 기대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