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수씨는 어떠신가?"
"그저 그래요. 그나마 진행이 그리 빠르지 않으니 감사하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막냇동생의 목소리가 잠겨 있다.
"아픈 데는 없고?"
"아픈 데는 없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주도에 살고 있는 막냇동생과 통화를 했다.
그의 아내이자 내게는 제수씨 영자씨는 지금 전두엽 치매를 앓고 있다. 4년 전,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발병했다. 뇌 앞쪽에 있는 전두엽이 심하게 손상되기 시작했고, 의사는 병의 진행이 빠르면 1년도 못 가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었다. 막내는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아내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이른바 '올인'이었다.
우선 아내가 운영하던 순대국밥집을 이어받았다. 벅찬 일이었지만, 그동안 당찬 아내가 알뜰하게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른 새벽, 막내는 아픈 아내와 함께 가게로 출근한다.
아내를 잠시 눕혀 놓고 장사를 준비한다. 아내를 깨워 아침을 먹이고 차에 태워 주간보호센터로 보낸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직원들이 출근하면 그제야 바쁜 아침 시간 속에서 잠시 한숨을 돌린다.
점심 장사가 끝나고 조금 한가해지면 다시 아내가 있는 주간보호센터로 향한다. 이제는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 아내가 남편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치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맡겨졌던 아이를 엄마가 데리러 왔을 때, 세상 누구보다 반가워하는 아이의 모습과 닮았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둘만의 시간이다. 호젓한 숲길을 함께 걷고, 노을이 아름다운 해변을 걷는다. 아내가 좋아하는 베이커리 카페에 들러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막내는 아내의 입가에 묻은 것을 닦아준다.
아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에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 번진다.

▲남편 순업씨와 아내 영자씨와 산책KBS 방송화면 캡쳐한 사진임 ⓒ KBS
두 사람이 함께 걸어온 길
20대 초반의 경상도 청년과 제주 아가씨가 서울의 어느 전자공장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불꽃처럼 가까워졌고, 당시로서도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궁핍했던 신혼살림의 돌파구를 찾아 아내는 친정이 있는 제주도로 가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그렇게 시작한 제주 생활도 결코 녹록지 않았다. 처가살이부터 어묵 배달, 버스 기사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거친 제주의 맞바람과 부딪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아내 역시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억척스럽게 버텨냈다. 힘든 날에는 서로를 다독였고, 좋은 날에는 함께 웃었다. 그렇게 어느덧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들 무렵, 조금씩 삶의 여유가 생겼다. 서로 꿈꾸던 보금자리 예쁜 집도 지었다. 이제는 그동안의 고생을 조금쯤 보상받으며 살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은 두 사람이 바라던 행복을 오래도록 그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이 일거수일투족을 살펴야 하는 치매 환자. 그리고 그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통과 어려움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가장 두렵고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로 치매를 꼽는다. 막내 역시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주간보호센터의 도움을 받으며 아내를 돌보고 있다.
그런데 막내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먹고 마시는 것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아내가 빵과 단 음식을 좋아하다 보니 당뇨까지 찾아왔다. 특히 스스로 식단과 혈당을 관리하기 어려운 치매 환자에게 당뇨가 생기면 관리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의사의 이야기에 막내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어르고 달래기도 하고, 혈당에 좋지 않은 음식은 몰래 치워놓기도 했다. 때로는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빼앗아야 하는 마음 아픈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철저한 식이 관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혈당이 정상 범위로 돌아온 것이다. 담당 의사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몇 년째 당뇨약을 먹으며 혈당을 관리하고 있는 나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내를 향한 막내의 지극한 정성과 노력이 만들어낸 작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막내에게는 수호천사들이 있다
다행히도 치매 환자인 아내를 돌보는 막내가 혼자는 아니다. 환자에게도, 환자를 돌보는 막내에게도 꼭 필요한 사랑과 격려, 용기를 아낌없이 보내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가까이 살고 있는 큰형님과 넷째 동생 가족이다. 우리 집은 5남 1녀, 여섯 남매다. 셋째인 나와 작은형님, 큰누님은 육지에 살고 있고, 큰형님과 넷째, 막내 세 형제는 제주에 살고 있다.
은퇴 후 제주로 내려가 터를 잡은 큰형님. 그리고 오래전부터 혼자 지내는 막내가 외롭지 않도록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넷째. 두 형제의 가족들은 아픈 동서와 제수씨, 힘든 시동생이자 친동생인 막내를 위해 늘 곁을 지켜주고 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고 웃으며, 같이 먹고 마신다. 그렇게 한 가족으로 함께 살아간다. 특히 맏형수님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늘 앞장서서 가족을 챙기신다. 감히 '천사 중의 천사'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사랑의 힘이 작용한 것일까. 막내 제수씨의 병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가족 모두에게는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막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고생하는 막내가 너무 애처롭고 안쓰럽다. 육지에 살면서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하는 나는 늘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인간극장>을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KBS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 아픈 가족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 가족처럼 치매 환자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도 <인간극장>에서는 담담하게 보여주곤 한다.
'만약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방송을 통해 소개된다면 어떨까?' 수많은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공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게 아내를 돌보고 있는 막냇동생과, 곁에서 함께 애쓰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작은 보람과 격려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KBS에 사연을 제보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보한 다음 날 바로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7월의 장마와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제작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촬영에 임했다. 가족들의 일상을 따라다니며 촬영하고, 때로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고된 과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수고를 묵묵히 감당해 준 PD님과 작가님을 비롯한 제작진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8월 둘째 주 월요일부터 5일 동안, 〈영자 씨, 나를 잊지 말아요〉 라는 제목으로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전국에 방송되었다.

▲영자씨 나를 잊지말아요.KBS 인간극장 첫화면 ⓒ KBS
"영자 씨, 나를 잊지 말아요"
방송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특별했다. 화면 속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지극히 돌보는 막냇동생의 모습. 아픈 엄마를 말없이 바라보는 젊은 아들의 모습. 그리고 곁에서 한결같이 가족을 돌봐주는 큰형님과 넷째 동생 가족들의 모습.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아름답고 애틋했다. 무엇보다 방송을 보고 난 뒤 담당 작가님으로부터 많은 시청자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우리 가족에게만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수많은 가족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비슷한 아픔과 사랑을 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방송 이후 지금도 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KBS 2TV에서 스페셜로 다시 방송되고 있다. 처음 방송을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마음으로 화면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는 단순한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송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막내가 얼마나 힘들까. 그러면서도 아내의 손을 놓지 않는 막내가 참 대단하고 고맙다. 아마 막내가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저 지금처럼만. 아내가 조금 더 오래 지금의 모습으로 곁에 있어 주기를.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그 마음이 방송 마지막에 고스란히 담겼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으니, 더 나빠지지만 말고... 영자 씨, 나를 잊지 말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깊은 사랑이 있을까. 건강할 때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하나씩 잃어가는 아내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는 사랑. 어쩌면 그것이 부부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가장 깊은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육지에 있어 직접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늘 있다. 하지만 멀리서라도 막내와 제수씨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처럼 우리 가족 모두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다. 언젠가 시간이 더 흘러 지금의 기억마저 희미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막내가 잡아주는 손의 따뜻함만큼은 영자씨에게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란다.
영자씨, 부디 오래도록 우리 가족 곁에 있어 주세요. 그리고 막냇동생의 바람처럼...
"영자 씨, 나를 잊지 말아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