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스틸

<레미제라블> 스틸 ⓒ UPI코리아


인생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아들과 함께 투표한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이번 투표가 축제인양 들떠있는 나를 민망해하는 아들의 눈초리도 무시하고 인증샷까지 찍었다. 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을 봤다.

대통령 선거에 <레미제라블>이라…. 뭔가 역사적 감동이 있겠다는 기대감에 뺨을 에는 추위도 잊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스마트폰으로 재빠르게 올라온 선거와 관련된 소식은 붕 떠 있던 내 마음을 다시 과거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했다. 일본 자민당의 재집권을 보며 한심하다며 쯧쯧 했던 게 엊그제인데…. 똥 묻은 개가 나란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덕(?)에 생애 첫 투표와 영화까지 본 아들은 엄하게도 해롱거리는 이 엄마의 추태를 감당해야만 했다.

저 청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밤 새워 물어 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 번은
울 줄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뚱어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새/김지하)

선혈이 낭자한 듯한 이 시는 7, 80년대 대학가에서 운동가요로 많이 불렸던 시인 김지하의 '새'라는 시다. 시인 김지하는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다. 또한, 시인 김지하의 이 시를 낭송하고, 이 민중가요로 울분을 토했던 사람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뽑았을 것이다.

내가, 내 가치관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을 뽑았다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이번 선거가 그 어느 때보다 젊은 세대의 투표 독려 캠페인이 무색할 정도로 중장년층의 투표 열기가 뜨거웠다. 이것은 이해관계가 철저히 대변된 결과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노년층이 증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나이별 인구 분포를 고려한다면 당분간, 혹은 영원히 그 결과를 바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대단히 '슬픈 확률적 결과'이기도 하다.

중장년층 10명이 투표한다고 해서 뭐 어때서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렇다.10명의 투표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재단한 세계관으로, 그들 식의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결정하겠다는 그 무서운 논리의 문제다. 선거는 끝났다. 절망하는 젊은이들의 생각과 열망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의 것만을 움켜쥔 어른들…. 그들의 눈에는 젊은이들이 힘겹게 살아가야 할 고통은 보이지 않고, 자신보다 훨씬 더 살아갈 날들이 많은 젊은이의 삶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는 '투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 유니버셜픽쳐스


이 뜬금없는 선거 분석을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후기에서 쓰고 있는 것은 바로 내가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큰 감동한 지점 때문이다.

가난한 미혼모의 딸 코제트를 안고 도망치며 장발장은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이 어리고 가냘픈 생명을 자신에게 맡긴 것은 비로소 자신의 삶에 한 줄기 행복의 빛이 드리워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코제트가 거리의 선동가 마리우스를 사랑하게 된다.

자신의 신분이 들켜 다시 먼 길을 떠나려 했던 장발장은 코제트의 사랑을 알고, 자신을 희생해가며 바리케이트 저편으로 들어가 마리우스를 구해 코제트의 품에 안겨주고 자신은 홀로 수도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

우리가 흔히 보았던 막장 드라마였다면 장발장은 자신의 딸과도 같은 코제트에 대한 집착으로 위기의 마리우스 정도쯤 얼마든 처치해 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장발장은 반대였다. 코제트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걸 알고, 이제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떠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장발장 역시 슬프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들의 사랑, 그들의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한 몸 기꺼이 희생한다.

영화 속 장발장이 늘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 애썼지만 바리케이트 뒤에서 잡힌 쟈베르 경감을 놓아주는 결정을 보건대, 장발장의 입장이 꼭 바리케이트 뒤의 젊은이들과 일치하는 건 아닌 듯하다.

하지만 장발장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생이 그다지 길지 않음을, 이제 코제트를 더 오래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마리우스임을, 그리고 무엇보다 코제트가 원하는 사람이 마리우스임을…. 이 장면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오래도록 우리가 생각해볼 장면이다.

더구나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지나간 세대의 방식 그대로 살라고 강변하고 있는 대만민국 18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서 더더욱 그렇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장발장이 코제트를 포기하는 그 순간이다. 젊은이들을 위해 그 무엇도 양보하지 않는 이 시대의 어른들이 부끄러워야 할 순간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 유니버셜픽쳐스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구원은 별개가 아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묘한 영화다. 영화 끝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는다. 장발장도 죽었고, 바리케이트를 사수하던 거의 모든 젊은이가 죽어갔다. 심지어 어린 소년까지, 그들의 시체는 거리에 전시됐다. 그들의 피는 거리를 적셨다.

그런데 이상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 비감하지도 않다. 아마도 그건 지금까지 죽은 모든 사람이 광장의 바리케이트에 모여 부른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휘날레 때문일 듯하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Lost in the valley of the night(밤의 계곡에서 길을 잃은 이들의 노래가)
It is a music of a people who are climbing to the light(빛을 향해 오르려는 이들의 노래가).(중략)

 <레미제라블> 스틸.

<레미제라블> 스틸. ⓒ Working Title Films


수도원에서 홀로 쓸쓸하게 죽어가는 장발장의 눈앞에 코제트의 죽은 엄마가 나타난다. 그리고 코제트 부부로 인해 장발장의 죽음은 일평생 자신과의 싸움을 홀로 해온 한 인간의 종교적, 현세적 구원을 담은 듯하다.

하지만 막상 그 지점은 결코 거리의 창문이 열리지 않은 채 정부군의 총칼에 희생된 젊은이들의 죽음과 대비된다. 그저 '착하게 살자' 라는 듯한 도덕적 명제만을 남긴 듯하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장면, 죽어간 모든 이들이 함께 부르는 혁명가는 개인적, 도덕적, 구원에 그친 듯한 장발장의 죽음조차 새로운 의미로 각인된다.

되돌아보건대, 코제트 엄마인 판틴은 시장이 된 장발장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공장에서 쫓겨나면서 거리의 여자가 됐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장발장은 자신의 도덕적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가난의 구제에 힘쓰지만 판틴의 죽음으로 개인적, 도덕적 구제의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한계를 장발장은 다시 판틴의 딸 코제트를 대신 양육하는 것으로 보상하려 했고, 결국 코제트의 남편이 될 사회 혁명가 마리우스를 구하는 것까지 그의 구원의 길은 닿는다.

물론 영화는 개인적 구원이 사회적 구원에 닿아야 한다고 도식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혁명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이 마지막 휘날레를 장식하며 부르는 저 노래 속에서,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중단없는 노력이 결국에 가서는 개인이든, 사회든 구원을 얻게 만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는 2012년 12월 패배감을 삼키는 누군가에겐 분명 위로가 될 것이다.

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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