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27조 제3항입니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은 잘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재판 지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결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탓에 실질적인 구제를 받기 어렵거나 당사자가 사망했다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정의의 유효기간'이 지난 재판 지연 사례를 추적하고, 우리보다 먼저 사회적 논의를 진행한 독일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올바른 판결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탓에 실질적인 구제를 받기 어렵다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은 지난 2018년 5월 KTX해고승무원들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법원장 비서실장과 면담을 마치고 입장을 밝히는 장면이다. ⓒ 이희훈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요."

박영삼(49)씨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지난달 6일 오전 8시 30분 밤샘근무를 마치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난 7년을 묻는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2014년 12월 박씨를 비롯한 일진전기 노동자 6명은 부당해고를 당했고, 2021년 7월 대법원은 "부당해고가 맞다"라고 판결했다. 이후 파기환송심 과정에서 회사는 소송을 포기했다. 노동자들이 승소했으니,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을까. 그렇지 않았다.

회사로 돌아간 건 박씨 뿐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끝내 회사로 돌아오지 못했다. 재판이 지연되면서 정년에 가까워진 탓이다. 다시는 이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한 이도 있었다. 법원은 그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그들의 삶은 끝내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박씨에게도 긴 소송 기간은 상처로 남았다. 법원의 시간은 6년 3개월이었다. 대법원에서만 4년 7개월이 흘렀다. 박씨가 복직한 것은 부당해고를 당한 지 7년 가까이 흐른 때였다.

부당해고를 당한 직후에는 회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했다. 8개월이 지나자, 다들 생계가 어려워졌다. 결국 농성장을 정리했다. 박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전국의 공사 현장을 전전했다. 막노동을 하며 지낸 세월만 6년이 넘었다.

결국 부당해고 기간 지급받지 못한 임금을 일부 받고 회사에 복직했지만, 그의 삶에 깊게 팬 상흔은 쉬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지난 7년을 이렇게 뒤돌아봤다.

"인생을 까먹은 거죠."

이 사건을 대리한 문성덕 변호사(한국노총 중앙법률원)는 "(소송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하면서 힘들게 투쟁했다. 부당해고 7년 만에 복직할 기회가 왔지만, 대부분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면서 "이 사건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다"라고 밝혔다.


날로 심각해지는 재판 지연

재판 지연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심급을 가리지 않는다. 대법원이 지난 9월에 발간한 <2022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모든 심급에서 사건 처리 기간이 증가했다.

1심 합의부 민사사건(본안)의 경우, 소 제기부터 판결까지 2년 이상 걸린 '장기미제'사건은 2017년 2929건에서 2021년 4898건으로 67.2% 증가했다. 사건 증가 때문일까. 아니다. 같은 기간 사건 수는 2%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가장 큰 문제가 있는 곳은 대법원이다. 평균 처리기간이 2017년 3.8개월에서 2021년 8개월로 2배 이상 늘었다. 사건 수는 2013년 1만 3362건에서 2021년 1만 9161건으로 43.3% 증가했는데, 장기 미제 사건은 더욱 크게 늘었다. 상고심 접수부터 판결까지의 기간이 2년을 초과한 사건은 2017년 280건에서 2021년 1238건으로 3배 이상 늘었다.

최근 소송 제기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10년 이상 걸린 사건의 판결이 연달아 나왔다. 현대·기아자동차와 포스코 사내하청 노동자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은 각각 11년이 지난 올해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최장기 미제사건' 꼬리표가 붙었던 '2012헌바66' 사건의 최종 결론을 내렸다. 헌법소원심판 청구 10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사라진 헌법 27조 3항과 독일의 재판지연보상법

2017년 10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한글로 바뀐 헌재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 연합뉴스

우리나라 헌법 제27조 제3항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은 사라졌다. 재판 지연으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도 구제받을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1999년 법원의 재판 지연이 위헌임을 확인해달라는 내용의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각하했다. "신속한 재판을 위한 어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청구권이 이 헌법 규정으로부터 직접 발생하지 아니한다"라고 했다. 법률상 쟁점의 난이도 등을 고려해야 하므로, 관할 법원에게는 광범위한 재량권이 부여된다는 이유를 댔다. 법원 역시 재판 지연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받아들인 사례는 없다.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이를 다툴 수 있는 권리구제제도가 존재한다면, 재판 지연 문제는 줄어들까. 이미 이런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독일이다. 인구·사건 대비 판사 비율이 유럽 최상위권인 독일에서도 재판 지연 문제는 존재한다. 얼마 전까지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도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1년 전 상황은 바뀌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2010년 독일 정부에 재판 지연에 대한 권리구제제도 도입을 명하는 판결(Rumpf v. Germany 사건)을 내리면서, 큰 변화가 일었다. 2011년 '재판지연보상법'으로 알려진 법원조직법 198조(§ 198 GVG)가 마련됐다. 이제 소송당사자는 재판을 지연시키는 재판부에 지연 경고(Verzögerungsrüge)를 할 수 있고, 이후 과도한 재판 기간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 상급법원 등에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보상금은 연 1200유로(약 165만 원)이고, 일부 증액 또는 감액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재판지연보상법을 두고 법원과 판사들이 신속한 재판을 위한 노력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반해 재판 지연을 예방하는 효과가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다. 재판지연보상법은 사라진 우리 헌법 27조 3항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는 지난여름부터 우리나라의 재판 지연 사례를 추적했다. 이후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필요성을 강조하는 김중권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함께 관련 자료를 검토했고, 10월 독일과 프랑스에서 판사, 변호사, 학자들을 직접 만났다.

재판지연보상법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은 서로 달랐지만, 한 목소리로 강조한 내용이 있다. 재판 지연을 국가의 책임으로 인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될 경우 이를 다툴 수 있는 권리구제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0월 19일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찾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소재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대법정의 모습.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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