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광해군 그는 과연 폭군이었던가? 한 연극단체가 우리에게 폭군이라고 알려져 있는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을 하는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고 한다. 창작극 '천년제국 1623년'(극본 차근호,연출 박계배)은 광해군 을 '세상을 개혁해 보려다 폐위 당한 임금'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사실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은 학술적으로는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98년 서울대 강사로 있던 한명기 씨는 계간 '역사비평'가을호에 '폭군인가 현군인가-광해군 다시 읽기'라는 논문을 기고했는데 이 논문에서 한씨는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나 이미지는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서인의 집권이 지속되면서 의도적으로 광해군을 폄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실례로 한씨는 광해군 시대의 실록인 '광해군 일기'의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의 내용이 다름을 지적했다. 한쪽이 의도적으로 이후 수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발발 후 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이 아버지인 선조를 대신해 활약하는 등 태백산본에 보이는 내용들이 정족산본에는 없다는 것이다. MBC 사극 '허준'에서 임란동안 군대를 이끌던 광해군의 모습은 바로 '광해군 일기'태백산본에 기초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건 하나의 예외적 논문이었고 여전히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접하기 쉬운 역사교과서나 사극 같은 데서는 광해군을 폭군으로만 그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임금에 대해 우리가 고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에게서 본받을 점은 사라진다. 그리고 어떤 역사가 권력의 아집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재해석에 재해석을 통해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된다. 그것이 더 더욱 연극과 같은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영역의 작업이라면 그 영향력은 더욱 더 클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이 연극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보고 싶다.

<'천년제국 1623년' 연극 안내>
10월27일~11월12까지 동숭홀(문의 02-762-0010)

광해군은 폭군으로 낙인 찍혔기에 그의 사후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연극과 별개로 광해군 릉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이글은 당시 본 기자와 동행했던 기자의 아내가 쓴 글이다.

<쓸쓸한 왕릉, 광해군릉>(글:박은정)

광해군 묘소를 다녀 왔습니다. 지난해부터 틈틈이 테마로 잡아서 왕릉을 답사해 왔는데, 2000년 첫 답사지를 광해군릉으로 잡아 어제 다녀왔습니다.

뭐, 광해군으로 정한 이유가 특별히 있었다기보다 드라마 ‘허준’을 보면서 생각이 났고, 제 개인적으로 너무 욕심을 부리며 사는 인생이 아닌가 하는 반성으로 인생무상함을 느껴 볼 요량으로...

광해군묘는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반정에 의해 축출된 왕, 아니 정확히 군(君)이어서인지 근처 사시는 분들도 잘 모랐습니다. 왕릉답사라는 책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정말 영 못찾고 올 뻔했습니다.

반정에 의해 축출된 임금이고, 도덕적으로 동복형 임해군을 사지로 몰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잘 알려진 대로 어린아이에 불과한 영창대군도 죽였고, 계모인 인목대비까지 폐비시켜 반정의 빌미를 준 사람이어서였는지 광해군은 역사적으로도 무척 평가절하된 인물이죠.

하지만 TV로 방영된 '허준'도 광해군 때의 인물이고 광해군 명으로 동의보감을 쓴 것이고 임진란 이후 세제개혁도 단행하였고, 이밖에 우리가 잘 아는 후금과 명나라 사이의 중도외교도 광해군의 치적이었죠.

찾아가는 길엔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었습니다. 승자의 역사만을 찬양하는 세상인심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헤매다 우연히 사릉(思陵-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릉)도 지나가게 되었는데 참 우습죠? 경우는 다르지만 다들 역사에 잊혀진 사람들...

사릉은 비공개였는데 단종의 비인 그녀의 인생도 참 기구해요. 비운의 왕비라 할 수 있죠. 단종에게 시집만 안 갔어도 사대부 부인으로 적당한 부귀를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터인데... 남편 일찍 죽어, 자식도 없어, 궁궐에서 쫓겨나 서인으로... 82세까지 살았다는데 그 세월동안 무슨 의미로 삶을 살았을까? 이런저런 생각하며 닫힌 철문 사이로 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구슬프게 새소리가 들리더군요.

다시 발걸음을 돌려 광해군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우연히 임해군의 묘소 근처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선조에겐 정비의 후사가 없었어요. 임해군이 장자였고, 광해군은 차자. 임진란때 긴박한 나라사정으로 정비가 제일 이뻐했고, 총명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었는데 이후 명나라에선 조선을 간섭하려 들 때마다 이 문제를 빌미로 들고 나왔습니다. 세자책봉될 때뿐만이 아니라 왕이 되어서도요.

나중에 왕비가 죽고 선조가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인목대비를 후비로 들이고 영창대군이 태어났으니... 광해군은 장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니고, 명나라는 이를 빌미로 황체칙서를 안 내주고...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거기다 역모에 대한 부담감을 늘 존재했을 것이고... 광해군은 죽어서 자신이 누운 자리 근처에 묻힌 형과 만나서는 무슨 말을 건넸을까요?

여하튼 힘들게 광해군묘를 찾았습니다. 어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공동묘역의 안쪽에 표지판도 없이 있더군요. 임금의 예가 아닌 대군의 예로서 장사 지냈다고는 하나 어찌 보면 잘 나가는 한 가문의 묘보다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겨울나무가지 사이로 작은 새가 푸드득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금은 숙연해지기도 하고, 찾아가는 길이 험하면 험한 대로 산책이나 한다고 생각하고, 걸으며 주위 풍경도 보고... 꼭 묘지를 찾아 간다기보다는 나를 가까이서 만나는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삶은 죽음을 향해 어떻게 죽느냐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그러더군요. 다들 지금 행복하신 거죠?

<약간은 무상함을 느끼고픈 하루가/2000년2월19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의 드가가 제공합니다. '드가(박성호)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방문하시면 다큐멘터리에 관한 풍부한 정보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myhome.shinbiro.com/~fhuco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