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얼마 전 저희 학교에 장학지도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장학사가 오면 학교가 어떤 상태가 되는가는 아마 대한민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압니다.

학생들은 학교의 주인(?)답게 청소를 하느라 부산하고 교사들도 장부 정리하랴 수업 준비하랴 모두 정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학생이든 교사든 장학사는 반갑지 않은 존재입니다.

한바탕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쇼(?)가 진행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해왔는데 모처럼 장학지도의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책과 먼지로 뒤덮인 책상도 정리하고 학교가 한결 깨끗해지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물론 학생들의 수고가 필요하긴 하지만.

장학지도를 받는 김에 캐비닛을 정리하다 우연히 아주 오래된 졸업앨범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선배교사가 캐비닛에 보관해둔 것을 그대로 둔 것 같습니다. 순간 묘한 향수가 떠올라 이십 년도 더 된 오래된 앨범을 펼쳐봅니다. 까까머리에 까만 교복을 입고 경직된 자세로 찍은 사진들이 정겨워 한참을 들여다 보았답니다.

정신없이 향수에 빠져들 무렵 오래되어 빛바랜 졸업앨범 속에서 한 장의 졸업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앨범은 1979년 저희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것이었고 물론 그 졸업장의 주인은 이제는 불혹을 바라보는 저의 전설 같은 선배님입니다(저는 모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십 년도 더 된 졸업장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벌써 한 달 전쯤에 졸업앨범을 위한 사진촬영을 하였고 두어 달 후면 또 졸업식이 있겠네요. 교사가 되고 나서 제가 학생 때와 비교해서 많이 달라진 것을 두어 가지 꼽으라면 교사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은 학생들, 그리고 소풍을 버스를 이용해서 간다는 것(저희땐 걸어서 널찍한 야산에 소풍을 갔습니다), 마지막은 바로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는 학생이 많다보니 당연히 주인을 찾지 못한 졸업장과 상장과 상품들은 제 캐비닛에서 언제 깰지 모르는 기약 없는 잠을 자야 하는 것이죠. 다행히 졸업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면 쑥스러운 듯이 졸업장을 찾아가지 않은 학생들과 꼭 닮은 여동생이나 남동생들이 슬며시 제게 다가와 이런 말들을 던집니다.
"선생님요, 우리 언니(오빠)가 졸업장 좀 찾아오라는데요"

그래도 이런 식으로 졸업장을 찾아가는 학생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숫제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졸업장을 찾아가지 않는 학생도 한 해에 몇 명씩 꼭 있습니다.

1979년이면 그래도 졸업식엔 열심히 참가하였을 때인데 제가 발견한 그 졸업장의 주인인 선배님은 무슨 이유로 졸업장을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남모를 가슴 아픈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 당시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사연이 있는 것은 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22년전의 그 앨범의 편집후기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여기, 떠나는 벗들에게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며
추억이 그리울 때 영원한 우정의 한 페이지를 고이고이 간직하여
서로 정다운 벗들을 상기하고 웃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우리 모두 축배하세!


그 만날 날을 기약하자는 약속을 하지 못한 채 그분은 아마도 힘든 세파 속으로 묵묵히 걸어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중학교시절을 넉넉히 회상하고 계시겠지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까 마음이 새삼 착잡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저에게도 주인에게 부름 받지 못한 졸업장이 몇 장 있습니다. '이걸 어쩌나?'하며 보낸 세월이 벌써 꽤 많이 되는군요.

돌아보면 그 세월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고 여태껏 감감무소식인 녀석들에 대한 서운함만 가득 하였습니다. 이제는 주인들에게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무개 학생의 졸업반 담임이었던 아무개입니다.
아무개 학생이 졸업한 지가 많이 되었는데 아직 졸업장을 찾아가지 않아 많이 늦었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졸업장을 보내드립니다.
아무개 학생이 항상 건강하고 좋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기를 희망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 학생들이나 학부모님이 많이 '황당'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