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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로 가는 기차 안. 맞은편 침대 칸에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탔다. 세 살쯤 되보이는 아이는 어떻게 통제할 방법이 없는 무지막지한 개구쟁이다. 연로한 할머니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꼬마는 금새 쪼르륵 복도로 나와서는 온 기차 안을 헤집고 다니기 일쑤다. 같은 침대 칸에 탄 남자는 자기도 또래의 딸아이가 있다며, 아이가 복도로 내빼려고 할 때마다 사탕이나 과자를 주면서 아이를 잘 어르고 달랬다.

▲ 카스의 위그르인 여인들.
ⓒ 노순택
그것도 한순간이고 아이는 틈만 나면 신발을 신고 복도로 나가려고 떼를 썼다. 지친 할머니도 더 이상 못 당해내겠는지 “가만히 좀 있어! 안 그러면 기차에다 버리고 간다”라며 사뭇 무서운 표정으로 혼을 낸다. 그래도 그 개구쟁이는 눈을 말똥히 뜬 채로 할머니의 팔목을 잡고 ‘나가자고’ 떼를 쓴다. 그때, 꼬마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할머니보다 더 눈을 무섭게 뜨고 아이를 윽박지르는 말. “너 자꾸 떼쓰고 말 안 들으면 위그르인이 잡아간다”.

그 남자의 말을 듣고 놀라서 ‘울음을 뚝 그친’것은 개구쟁이 꼬마가 아니었다. 바로 앞에 앉아있던 우리였다. 녀석은 그 무서운 말의 의미를 잘 이해를 못했는지 더 기세등등하게 떼를 쓰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남자도 그만 지친 것인지 달래기를 포기하려는 눈치였다. 아니면, ‘위그르인’보다 더 무서운 공포효과가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일까.

우리들은 이제 막 그 남자가 말한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위그르인들의 최대 밀집지역, 카스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용해할 수 없는 이역의 정서”

카스에 도착한 날은 마침 일요바자르가 열리는 날이었다. 바자르가 열리고 있는 뚱먼(東門)시장은 입구에서부터 개미떼들처럼 바글바글한 사람들과 자전거, 택시, 당나귀들이 뒤섞여 진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신장지역의 어디를 가더라도 크고 작은 바자르들이 상시적으로 열리고 있기는 하지만, 일요일마다 카스에서 열리는 일요바자르는 신장지역에서는 최대규모이다. 일요바자르에는 신장지역의 모든 특산품들이 다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인근의 국경도시나 이웃 도시 등에서도 카스의 일요바자르를 구경하고자 오는 사람들이 많다.

바자르는 원래 시장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상시적, 비상시적으로 열리는 교역이자 그들의 독특한 경제활동 방식의 하나다. 그러나 카스의 일요바자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단 이슬람문화권의 정서뿐만 아니라, 이곳을 거쳐서 중앙아시아로 그 문물들이 전파되었을 옛 실크로드의 희미한 자취이다. 그것은 또한 카스가 가지고 있는 한때의 찬란했던 기억이기도 하다.

실크로드가 번성했던 시절만 해도 카스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했던 중개무역의 중심도시국가였다. 즉, 고대 서역의 실크로드 도시국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동서 문물 교역의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는 가장 일찍이 국제시장을 형성했던 곳이다.

지리적인 위치 자체가 중앙아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국경도시인지라, 비단길 무역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절에는 카스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통하는 중개무역의 최전방이었으며 각지에서 눈 덮인 설산을 힘들게 넘어온 많은 상인들이 이곳에 도착해서 비로소 한숨을 돌리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도 했던 오아시스 도시이기도 했다.

“카스에 와보지 않고서는 신장에 왔다고 할 수가 없다”. 카스에 도착할 무렵, 기차 안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다. 신장위구르족 자치구 중에서도 가장 ‘위구르적’이고 ‘비중국적인’곳이라는 걸 비유하는 말이다. 때문에 중국의 위구르인들은 카스를 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부르고 있다.

▲ 카스시내 전경. 이곳의 대다수 위그르인들은 가난과 구직난에 시달리고 있다.
ⓒ 노순택
카스를 빗대어 중국에서는 ‘용해할 수 없는 이역의 정서’라는 말로 그 이미지를 묘사하기도 한다. 신장위그르족 자치구의 성도인 우루무치가 이미 상당부분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면서 위구르족 특유의 문화는 많이 탈색된 반면, 그리고 투르판 역시 갖가지 관광상품들의 개발과 잦은 외지 여행객들의 발길로 인해 그 이미지가 적당히 세련되어 있는 반면, 카스는 아직까지도 이슬람 세계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비함과 이방인들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그들만의 ‘왕국적’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 네 개의 세계”

현대의 카스는 ‘개발의 대상’이다. 이곳은 낙후된 서부지역의 빈곤이 압축되어 있는 소수민족 자치지역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변방도시이다. 이들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중국판 뉴프론티어’정책인 서부대개발 사업은 주로 신장지역의 막대한 석유와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자 지역간 불균등 발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개방 정책의 새로운 ‘대장정’이다. 개혁개방 초기의 발전전략이 주로 동부연해지역 중심이었고 일정정도 그 성과를 이루었다면, 90년대 후반이후에는 주로 내륙의 서부지역 개발이 발전전략의 화두로 나서고 있다.

중국과학원 및 칭화대학교 국정연구중심의 주임인 후안깡(胡鞍鋼)은 최근 발표한 책 ‘지역과 발전: 서부개발 신전략’에서 중국내 지역간 발전불평등문제를 ‘하나의 중국과 네개의 세계’라는 말로 압축했다. 중국인구의 2.2%를 점하고 있는 상하이와 베이징, 션젼 등이 GDP면에서 중국내 제1세계라고 한다면 그 나머지 지역은 각각 제2, 3, 4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절반이상의 지역과 절반이상의 인구가 바로 이 ‘제 4세계’(그 대부분이 서부지역임)에 속하고 있다는 것과 이들 4세계와 1세계 지역 주민들의 평균 GDP차이가 10배를 넘고 있다는 사실.

중국의 서부대개발 정책은 동·서 지역간의 경제적 발전격차의 해소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경제발전이라는 ‘당근정책’을 통해 서부지역의 정치사회적 불만과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전략적인 의미도 담겨있다. 90년대 들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신장지역의 위그르족을 중심으로 한 분리독립운동 등과 같은 정치사회적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현재로서는‘발전을 통한 길들이기’ 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서부지역의 70%이상의 인구가 절대빈곤인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또한 중국내 소수민족 중 약 80%가 이곳 서부지역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민족 지역의 경제적 빈곤은 주류민족인 한족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빌미가 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던 이 지역의 ‘분리주의 싹’을 더욱 키울 수 있는 사회분열의 화약고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중국정부는 이러한 서부지역의 잠재적 위험을 간파하고 ‘발전을 통한 통합’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카스에서 발전과 통합의 문제는 접점이 없는 평행선과 같은 것이다.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병원과 대형 호텔들, 그리고 반듯하게 닦인 아스팔트들은 카스의 발전을 상징하고 있지만 ‘통합’의 상징은 좀 체로 눈에 띄지가 않는다.

“만일 이곳에 위구르족들만 살았다고 하면 이정도의 발전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카스는 온통 위그르족들의 저 낡아빠진 집들처럼 지저분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었죠. 전염병까지 창궐했었고. 한족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감히 이런 발전을 이룰수 있었겠어....”

카스 시내에서 택시영업을 하는 모 한족 택시기사의 말이다. 카스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족들도 이와 비슷한말들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카스의 ‘다수민족’ 위구르족들은 이에 대해 대부분은 언급을 회피한다. 그들이 털어놓는 유일한 속내는 “마음으로는 알고 있으나 입으로는 말하지 못한다”는 것.

카스는 지금 ‘인민의 전쟁’ 중

카스의 역사

남으로는 만년설로 유명한 중국의 톈산(天山)산맥이 있고 북으로는 쿤룬산맥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타림분지가, 북동쪽으로는 파미르고원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카스는 그 지리적 위치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중앙아시아와 유럽, 이슬람권 세계로 연결되고 있는 중국 내에서도 가장 ‘국제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즉 카스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동시에 목적지였다.

카스의 완전한 명칭은 카슈가르(Kashgar)이며 위구르어로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다채로운 지방” 또는 “형형색색의 집, 녹색의 유리기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카스가 본격적인 중국의 역사 속으로 편입된 시기는 1884년 청조말기에 신장성이 세워짐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카스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면, 그 기록이 BC 2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한(漢)이 서역과 교역하였을 때 처음으로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명칭이 소륵국(疏勒國)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오대(五代)초기에는 이곳 카스를 중심으로 하여 카라한 왕조가 들어섰는데, 이때부터 이슬람교를 정식 종교로 삼게 되었다. 즉 카라한 왕조의 성립을 기점으로 카스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전체 신장지역 이슬람교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 후 본격적인 서역경영에 나선 당(唐)의 지배를 거쳐 11세기부터는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영향하에 있기도 했는데, 소륵국에서 카슈가르로 그 명칭이 바뀐 것은 원·명시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카스시가 세워진 것은 신중국 건립후인 1952년이다. 신중국으로 편입되기 전, 1933년에 카스에서는 ‘동투르키스탄회교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가 꾸려진 적도 있었다. 이 ‘경험’은 현재까지도 많은 위구르족 분리독립주의자들의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신중국 건립이후 카스는 중국 내 신장위구르 자치주의 한 지역으로 편입되면서, 위구르족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인의 역사의 일부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 박현숙 기자
카스는 또한 ‘테러분자들의 온상지’이기도 하다. 중국정부의 어법을 빌리자면 그렇다. 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9.11’ 테러사건 이후 중국 내에서 ‘인민의 전쟁’으로 불리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이 바로 이곳 카스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현재 ‘동투’(東突, 동투르키스탄. 중국 서부 신장지역의 위구르족 분리독립주의자들을 지칭)테러분자들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지난해 10월10일, 중국외교부부장인 탕쟈쉬엔이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천명한 중국내 ‘반테러’ 선언이다.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 참사사건으로 전세계가 떠들썩했던 시점이다.

같은해 10월16일. 중국 신장의 이리지역에서는 두 명의 ‘동투분자’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죄목은 ‘국가의 기본적인 이익을 해쳤기 때문’. 이들은 지난 1997년 2월5일 신장의 이리지역에서 ‘동투르키스탄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테러행위를 주도했던 핵심인물들이었다.

지난해 9.11 사건이 일어난 후 미국과 중국사이에는 모종의 ‘묵계’가 형성되었다. 바로 ‘반테러’라는 공통의 지상과제(?)이다. 미국은 그동안 제3세계의 인권문제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참견을 해왔으며, 특히 헤게모니 경쟁자인 중국의 인권문제에는 늘 훈수를 둬 왔다. 그럴 때마다 중국은 "너희나 잘하라"는 식의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미국과 인권문제로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왔던 중국정부가 9. 11 테러사건 이후 미국을 '응원'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응원’속에는 미국에 대한 모종의 ‘묵인’을 요구하는 신호가 담겨져 있다. ‘9.11’을 계기로 중국에서도 ‘테러와의 전쟁’을 할 테니, 이전처럼 인권탄압이라는 식으로 귀찮은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반 테러' 성명 이후 신장 위구르 자치주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특히 이들 동투세력들이 암약하고 있는 곳으로 지목된 카스 등의 변방 국경도시에서는 "위그르족 세 명만 모여도 잡혀간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곳곳에 총을 든 테러분자들이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도 들렸다.

위구르족이 인구비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내 위구르족 최대 밀집지역이자, 아프가니스탄 및 구소련 영토와 가장 근접거리에 있는 국경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1930년대 초반, 한때 이곳은 ‘동투르키스탄’이라는 독립국가의 깃발이 세워지기도 했던 중국내에서 가장 ‘위험한’ 소수민족 자치지역이라는 점들이 중국정부로 하여금 이곳 카스를 '테러분자들의 온상지‘로 지목하게 한 것이다.

“동쪽의 해가 밝지 않으면”

그러나, 카스의 그 어느 곳에서도 이들 테러분자들의 살벌한 ‘눈동자’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테러의 공포가 아니라, 위그르인들의 남루한 가난과 실업의 ‘공포’이다. ‘인민의 전쟁’은 오히려 위구르인들의 이러한 일상을 표현하기에 적합할 것 같았다.

카스의 위그르인들은 중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소수민족일 뿐이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위구르족들 중 한달 평균 수입이 인민폐로 1000위안(한화 약 15만원정도)을 넘는 사람은 거의 극소수이다. 대부분이 평균 400-500위안정도의 수입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젊은이들의 실업률과 구직난은 자못 심각하기까지 하다. 제법 배웠다고 하는 젊은 인재들도 심각한 구직난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 채스를 하고 있는 위그르인 남자들
ⓒ 노순택
중국 최대의 이슬람사원인 카스의 아이티카 사원 앞에 있는 상업중심 지구 지하상가에서 경비를 보고 있는 젊은 위구르족 청년 알리도 고학력 실업자나 마찬가지다. 그는 이곳에서 의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한달 임금 400위안(한화 약 6만원정도)인 상가경비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나마 경비직이라도 구했으니 자기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카스에 있는 정식 병원에서는 위구르족 의대출신들을 인정 안해줘요. 수준이 낮다고요. 대부분이 다 한족의사들이죠. 우리는 기껏해야 돈을 모아서 스스로 개업을 하거나 아니면 허가증없는 불법 병원에서 일하는 수 밖에 없죠. 그나마도 한정되어 있고요.”

옆에서 알리의 푸념을 듣고 있던 소꼽친구 누리비야도 한마디 거든다. 그녀도 역시 의과대학 졸업반이다.

“올해만 지나면 학교를 졸업하는데 취직할 길이 막막해요. 더군다나 남자도 아니어서 얘처럼 경비자리를 찾을 수도 없고. 지금 같은 반 동급생들도 취직걱정이 태산이죠. 더러는 우루무치나 란저우 등으로 나가 일자리를 찾으려고 하지만 대부분은 이곳 카스에서 일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우리를 받아줄 병원은 카스에서는 아직 많지 않아요.”

알리나 누리비야의 고민은 이곳 카스의 젊은 인재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다. 그나마 제법 성공한 축에 속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도 은행이나 호텔 등 한정된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카스에서는 제법 고급에 속하는 지니와커 호텔에서 일하는 타지르씨 역시 명문 란저우 대학을 졸업했지만 원하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꿈은 돈을 벌어 자신의 사업을 하는 것이란다. 그것만이 가장 확실한 안전판이라면서.

이러한 꿈은 은행원 알리프 역시 마찬가지다. 알리프의 꿈은 성공한 ‘위그르족 유태인’이 되는 것이다.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진 은행원이자, 부인 역시 카스시의 모 초등학교 부교장인 알리프 부부는 카스에서는 보기 드문 ‘행운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직업이 은행원이어서인지 알리프의 사고방식은 꽤나 현실적이고 개방적이다. 그는 현재 위구르족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 “못 배운탓”이라고 못을 박는다. 중앙정부의 정책을 탓하고 소수민족으로서의 서러움, 그리고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위그르족 분리독립을 먼저 외치기 전에 위구르인들 모두는 “배워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유태인들의 예를 들면서, 오늘날 유태인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힘을 가진 민족이 된 것은 모두가 다 교육과 경제력의 힘에 있다며, 위구르족들도 마땅히 이러한 유태민족을 따라 배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들 역시 어떻게 보면 유태인과 비슷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상업적인 기질이다. 위구르인 부모들은 자식이 어렸을 때부터 장사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그것을 통해 자립하는 법과 함께 위구르족 대대로 전해져오는 고유의 상술들을 터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의 위구르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러한 상인적 기질외에도 바로 교육이다. 배우지 않으면 중국 속의 소수민족이라는 서러움을 극복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쪽의 해가 밝지 않으면, 서쪽의 해라도 밝혀야 하는 것이다”.

▲ 카스의 인민광장 앞에 세워져 있는 초대형 마오주석 동상. 카스의 위구르인들은 인민광장보다는 이슬람사원인 아이티카 사원을 더 자주 찾는다.
ⓒ 노순택
실크로드에 갇힌 슬픈 이방인들

중국에서도 신장은 해가 가장 늦게 지는 지방이다. 베이징에서 해가 오후 7시쯤 뉘엿뉘엿하게 지기 시작할 때쯤, 신장은 아직도 훤한 대낮이다. 특히 신장에서도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카스는 해가 더 늦게 진다. 봄에는 보통 10시 무렵이 되어야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여름에는 자정가까이 되어서야 어두워진다. 그러나 베이징이나 카스나 시간은 항상 똑같다. 모든 시간은‘베이징 시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베이징 시간’은 이들 지역에 존재하는 자연적 시차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시차도 통솔하고 있다.

카슈가르의 인민공원 앞. 인민공원은 중국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곳으로, 인민의 휴식처로 사랑받는다. 그곳에는 만인을 평등하게 하려고 했던 중국 공산당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러나 카슈가르의 인민은 인민공원을 자주 찾지 않는다. 인민을 해방시켜주었던 마오쩌둥 주석의 웅장한 석상 앞에서 그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베이징 시각으로는 아침 7시30분. 하루의 첫 기도를 하기 위해 다시 아이티카 사원으로 위구르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모두들 표정이 없는 엄숙한 얼굴로 정해진 동작과 순서에 맞춰 쉴새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반복되는 기도동작을 한다. 이제 막 아침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위구르 할아버지에게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평화를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베이징, 2002년 6월29일. 중앙아시아의 옛 소련 영토인 키르기스탄에서 주재하고 있던 중국영사관과 그와 동행하고 있던 위그르족 상인이 저격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정부는 심증적으로‘동투분자’들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2년 9월 21일. 9.11사건 일주년을 맞은 미국이 다시금 세계적인 반 테러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사냥’할 준비를 하는 동안, 중국의 중앙방송(CCTV) 역시 다시금 신장지역의 동투분자들에 대한 ‘반 테러’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중국의 신장 지역을 중심으로 정부의 반 테러활동이 개시될 조짐이 있다고 전한다.

덧붙이는 글 | 기사중 일부내용은 주간 '시사저널'에도 실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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