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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도 지배한다. 이것은 비단 어제의 역사뿐 아니라 내일의 역사까지도 설명해주는 명제일 것이다.

승자에 의해 다시 쓰여지는 역사뿐 아니라, 승자가 정해놓은 게임의 룰에 따라 재구성되는 미래. 이 책은 냉전시대의 헤게모니 다툼에 인권이 어떻게 이용되었으며 열강들이 약소국들을 어떻게 유린했는지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인권, 그 위선의 역사 - 커스틴 셀라스
ⓒ 은행나무
과거는 미래를 내다보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인권의 이름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과 영국(부시는 대국민 연설과 기자회견에서 '후세인의 생화학 무시 사용 전력'을 거론했고, 블레어는 '지난 5년간 이라크에서 5세 이하의 어린아이 40만명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었다'며 이것은 인간존엄의 가치를 세우기 위한 전쟁이라고 역설했다)의 만행은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그들의 치사하고 가련한 생존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권선언'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인권 선언서의 33개 조항 중 24개가 미국의 주문서와 일치하고, 7개 조항이 부분적으로 합치하며, 단 두 개의 조항만이 미국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2차 대전 후 실시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도쿄 전범재판이 보여주는 것들(뉘른베르크 헌장은 연합국이 스스로에게 사면을 허락했으며, 전범재판소는 일반적인 의미의 침략이나 전쟁 범죄가 아니라 단지 패전한 적군의 범죄를 설치하기 위해 설치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또한 이런 공식 선언에 대해 법적으로 항의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고 있다)은 세계인권선언에 적힌 인권이란 실은 미국(혹은 열강)을 위한 인권일 뿐이며, 그것은 그들의 논리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한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특히 나치에 대한 대응에 미적거리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야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아르헨티나을 얄밉게 여겨, 유엔 로고의 세계지도에서 아르헨티나를 잘라내버린 OSS(CIA의 전신)디자인팀 팀장 '올리버 런드퀴스트'의 얘기는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들이 유엔 같은 세계기구를 얼마나 만만히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삶의 본질로 일컬어지는 '인권'이 강자들의 가면으로 이용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은 세계가 거대한 감옥임을 숨기기 위해 이 땅에 감옥이 존재한다던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미국은 스스로가 악의 축임을 숨기기 위해 끊임없이 인권을 들먹이며 다른 국가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다.

냉전의 세기가 저문 텅 빈 이데올로기의 전장을 이제 다시 인권이 메우고 있다. 인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만행들. 우리는 인권의 역사를 바로 알고, 열강들이 왜곡하는 사실 그 너머의 진실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저자 '커스틴 셀라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하고, 현재 런던에서 국제문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가디언>(Guardian), <타임>(Time),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 <오스트레일리안>(Australian), <뉴 스테이츠맨>(New Statesman), <스펙테이터>(Spectator), <에스콰이어>(Esquire), <보그>(Vogue)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책을 사랑하는 소년 소녀들의 모임(rnobook.cyworld.com)에도 올렸습니다.


인권, 그 위선의 역사

커스틴 셀라스 지음, 오승훈 옮김, 은행나무(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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