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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괜찮은가?”

장절의 음색에서도 염무가 느끼는 것과 같은 기색이 흘렀다. 염무는 시선을 상대에 고정시킨 채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염무에게 있어 지금은 오직 상대 외에는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자네의 이름은 ?”

염무는 자신의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는 상대가 적이 아니라 단순히 도전할 비무의 상대일 뿐이다.

“이름…?”

처음으로 상대의 입이 열렸다. 핏자국이 튄 옷이며 얼굴이었지만 꽤나 준수한 모습이었다.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한줄기 그늘과 우울함이 그의 전신에 배어 있지 않았다면 무림가나 세도가의 영화를 받고 자란 인물이라 해도 다름없었다. (나에게도 이름이 있었던가?) 그에게 이름은 어찌 보면 가면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이름이 어떠한들 무엇이 다르랴. 그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아 오는 동안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었다. 그 중 어느 것을 말해 준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본래 이름이라고 들었던 이름을 말해 주고 싶었다.

“자청(子晴)이라 하오.”
“...........?”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저 나이에 풍운삼절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 실력이라면 이미 강호에 회자되고 있어야 당연했다. 장절 하구연은 길다면 길 오십여년의 강호 경험 속에서 저런 젊은 놈을 키워낼 가문과 세력들을 모조리 헤집어 보았다. 없었다. 아니 저런 인물을 키워낼 가문이나 방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저 놈이 사용하는 무공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당연히 저 놈을 키워낼 방파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문은...?”

물어 본 사람은 염무였다.

“잊었소.”

그의 대답은 신속하고 명확했다. 하구연은 서서히 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렇겠지. 알게 되든 아니든 아무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어디서 너 같은 자를 키워 냈는지 궁금했을 뿐….”

그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상대를 주시했다. 생사결에 있어서 냉정은 고수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었다. 하지만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형제가 죽었다는 사실과 두 사람의 합공을 받아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상대의 기도는 그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단지 강하다는 것과는 다른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이 자신을 위축시키는 불길함과 음울함이 저 젊은 청년에게는 있었다.

“......... ?”

염무는 대형 하구연을 흘낏 바라보았다. 하구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오늘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한 자신의 형제들은 약속한 것과 같이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되었는지도 모르지.) 어차피 무림에 몸을 담았고 뜻이 맞는 형제를 얻었으니, 이 무림에서 죽는 것이 무림인의 운명일지도 몰랐다.

마음이 서서히 가라 앉았다. 스---윽----.

무슨 마음이었을까? 아마 강한 상대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을지도 모른다. 염무는 자신의 머리에 뒤집어 썻던 복면을 벗어 버렸다.

“어쩌다 우리 풍운삼절이 이리 되었는지…….”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였다. 복면까지 써가며 표물 아닌 표물(?)을 하류의 녹림도(綠林徒)처럼 습격했던 자신들에 대한 비웃음이었을 것이다.

“노부는 풍운삼절의 막내인 염무다.”
“.........?”

자청이라 밝힌 청년의 얼굴에 미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아마 풍운삼절과 같은 사람들이 어찌 이런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을 것이다.

풍운삼절은 진정한 무인들이었다. 약한 자를 도와주고, 불의를 참지 않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무인이었다. 그런 그들을 무림인들은 모두 친구로 삼기를 바랐다. 지금까지의 그들은 절대 이런 일에 나설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껏 허명뿐이었지. 그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군.”

장절 하구연 역시 복면을 벗었다. 그는 막내 염무가 저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염무는 언제나 듣는 편이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진한 형제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염무는 자신의 의견을 말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하구연은 자신의 막내 동생이 오늘 이 자리에서 뼈를 묻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 역시 그의 생각과 다를 바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켜들었다. (미안하다….형제여!) 하구연은 마음 속으로 이미 고혼이 된 둘째 아우와 갈비뼈가 허옇게 삐집고 나온 몰골의 막내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두 아우를 끼어들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한 아우를 잃고, 또 한 아우는 심각한 중상을 입게 만든 것이다.

꺼림직했지만 그리 위험한 것도 아니었고, 부탁한 자에게는 반드시 들어주어야 할 빚이 있었다.

하구연은 자기 자신 스스로에 대해 화가 끓어 올랐다. 개인적인 일에 두 아우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는 풍뢰벽장의 마지막 초식을 떠올렸다. 유일하게 자신이 십이성까지 익히지 못한 마지막 초식.

“네 자질은 최상이다. 하지만 구섬분천(九閃分天)은 네가 쉬지 않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지천명(智天命)의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흉내 정도 낼 수 있을 게다. 더구나 한번 펼치고 나면 한달 동안 네 몸을 추슬러야 할 것이니 극성(極盛)에 달하기 전까지는 펼칠 생각을 않는 게 좋겠구나.”

이 시각에 언제나 자애로운 웃음을 머금고 손자처럼 사랑해 주던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은 우연이었을까? 사부는 그가 강호에 출도한 후 삼년 뒤에 돌아가셨다.

언제나 할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돌보아 주던 사부의 무덤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오년 뒤였다. 팔년 동안 그는 장절이라는 분에 넘치는 외호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명성을 얻는 것보다 사부의 운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래서 사부의 무덤에서 사십구일 동안 잘못을 빌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사람관계에 있어 신중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로 인해 그는 중원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사귀고 싶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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