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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도 너무 덥다. 눈을 뜨자마자 함께 하루를 시작한 선풍기가 연일 혹사시키는 주인에게 시위라도 하는 듯 후덥지근한 바람을 심술궂게 토해내고 있다. 요즘 같은 살인적인 더위엔 선풍기도 무용지물이다. 아예 선풍기를 꺼버렸다.

'그래. 어디 얼마나 더운지, 더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 어차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데. 까짓 거 이왕이면 보람의 땀방울을 흘리는 거야.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거지 뭐.'

거창했다. 이번 더위가 세긴 세나 보다. 점심 준비를 하면서 이렇게 단호하게 결심을 해보긴 또 처음이다.

생각 같아선 시원한 콩국수 생각이 간절했지만 미처 콩도 준비되지 않았고 아침나절 어머니께서 커다란 호박 두 개를 밭에서 땄다며 한 개를 우리 집 냉장고에 넣어 놓고 가셨다. 무엇이든 신선할 때 먹어야 보약이 되는 법.

ⓒ 김정혜
호기 있게 호박을 꺼냈다. 연두색 호박이 어찌나 싱그러운지 손끝에 닿는 순간. 그 서늘함에 잠시 기분이 좋았다.

'그래. 오늘 점심은 이 호박 하나로 끝을 보는 거야!'

호박을 삼등분했다. 가지런히 잘라 놓은 호박에 소금을 살살 뿌려 밑간을 해놓았다. 그 사이 호박 볶음을 하기로 했다. 가스 불을 켜기가 두렵다. 하지만 과감하게 가스 불을 켰다. 후끈한 열기가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 김정혜
기름을 두르고 소금 간을 하고 마늘을 넣고 호박이 너무 익지 않게 하기 위해 불을 낮추고… 땀이 비 오듯 한다.

적당히 간이 밴 호박을 먼저 밀가루에 굴리고 풀어 놓은 계란에 푹 담갔다. 밀가루 옷을 입은 호박이 계란에 풍덩 빠지는 것처럼 나도 땀으로 범벅이 된 내 몸을 풍덩 물 속에 담그고 싶은 충동을 아주 잠깐 느꼈다.

ⓒ 김정혜
적당히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서 호박은 노릇노릇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 호박은 나보다 더 더울 것 같았다.

ⓒ 김정혜
호박의 씹히는 느낌을 싫어하는 딸아이를 위해서 아주 잘게 채 썬 호박에 밀가루와 계란을 섞어 걸쭉하게 반죽을 했다. 밀가루와 계란이 호박보다 더 넉넉하니 아이에겐 호박이 씹힐 겨를이 없을 것이다.

호박 하나로 세 가지의 요리를 했다. 호박전에 호박부침개에 호박볶음에… 호박잎도 한 가지 더 준비했다.

점심상을 차려놓고 아버지 어머니를 모셔왔다.

"복희 애비도 없는데 찬물에 밥 말아서 한 그릇 먹고 말지. 뭐 하러 땀 뻘뻘 흘려 가며 지지고 볶고 야단이냐."
"엄마는… 우리는 사람 아닌가. 어서 앉으세요. 호박이 붓기 빠지는데 좋데요. 많이 드세요."

"붓기 빼는 거는 늙은 호박이고. 밭에서 금방 딴 시퍼런 호박이 무슨 붓기를 얼마나 뺀다고."
"늙은 호박이든 애호박이든 하여간 호박은 호박이니까 지 할 일 지가 알아서 하겠지.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그 틈에 언제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오셨는지 아버지께서는 벌써 한잔을 들이키시곤 '카~아~' 기분 좋은 소리를 내시더니 호박전을 하나 집어 양념장에 찍어 입속으로 넣으셨다.

ⓒ 김정혜

"아버지! 어때요?"
"응. 맛있다. 아주 잘 구웠네. 근데 호박밭에 호박꽃이 없구나."

"무슨 호박꽃요?"
"봐라. 이거 완전히 호박밭 아니냐. 호박잎까지 아주 고루고루 구색을 맞췄네. 호박꽃만 빠졌구나."

그러고 보니 호박밭은 호박밭이었다. 호박밭이면 어떤가. 내 부모님이 한 끼 맛있게 드시면 나는 좋았다. 더군다나 지난 며칠 땡볕에서 공공근로를 하시느라 어지간히 고생을 하셨는지 어머니의 얼굴이 푸석푸석하게 부어 있어 내내 마음이 짠했다.

아니 짠하다 못해 어머니의 얼굴을 무심이라도 마주하기가 참으로 죄스러웠다. 그런 내 마음을 어머니께서 눈치라도 채셨는지 다행히 밥 한 그릇을 아주 맛있게 거뜬히 비우셨다. 흐르는 땀방울이 싫지 않았다.

아침마다 공공근로를 나가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가슴속에선 장작불이 활활 지펴진다. 아픔에 가슴이 타들어간다. 정 일을 하시려면 더울 때 쉬시고 시원할 때 나가시라고 아무리 말려도 어머니의 완강한 고집은 꺾일 줄 모른다.

"나보다야 애미 네가 더 고생이다. 아버지 점심 차리랴, 두 집 저녁밥 하랴, 아버지 모시고 병원 다니랴, 요즘은 하도 더워서 평소보다 많이 쉬어 가면서 일하니까 이 엄마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보다 네 몸이나 잘 챙겨."

오히려 이 딸자식 걱정을 하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어떨 땐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시는 어머니께 화도 나고 어떨 땐 못난 자식이란 죄책감에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명치끝이 먹먹해져 오기도 한다.

어머니는 나름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이는 게 정신건강에 좋고 하는 일없이 집에 가만히 있으면 없는 병도 생긴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둘러 대신다. 하지만 나는 정말 모르겠다. 진정으로 어머니를 위하는 길이 과연 어떤 것인지.

밥 한 그릇을 다 비우신 어머니의 콧등으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정말 맛있게 드신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점심상을 차리느라 비록 옷은 땀에 흠뻑 젖었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서 깨끗이 비우신 빈 밥그릇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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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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