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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었으나 바람은 그리 차지 않았다. 범어사 방향 하산길, 낙엽이 몰려 쌓인 개울의 고인 물 앞에 쪼그려 앉아 손을 씻었다. 손을 씻듯이 마음을 씻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산성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러 간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오른 것은, 오르고 싶었던 것은 산성이 아니라 내면에 버티고 선 높고 두터운 장벽이 아니었을까.

지난 겨울, 부산 금정산성에서는 그러하였다. 늦은 저녁을 먹고 중앙동역 근처 숙소로 돌아가는 밤. 전철 차창에 비친 내 모습에는 몸 안에 담아온 하루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나는 수시로 기우뚱거리며 몸 안의 나날을 출렁거려 왔는지도 모른다.

▲ 금정산성 성벽
ⓒ 부산 금정구청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

전철 온천장역에서 산행의 출발점인 남문까지 버스로 간다. 동문과 2.5km, 북문과 6.5km 거리를 두고 있는 남문에서 시작한 산성행은 2망루를 거쳐 금정산성 으뜸 관문인 동문에 이어지고, 다시 성벽을 타고 3망루로 나아간다.

금정산 능선을 따라 쌓은 금정선상(金井山城)은 길이 1만7337미터, 높이는 약 1.5~3미터,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과 네 개의 망루를 올렸다. 동쪽으로는 금정구, 남쪽으로는 동래구·부산진구·연제구, 서쪽으로는 북구, 북쪽으로는 양산시와 접해 있다.

▲ 금정산성 성벽
ⓒ 부산 금정구청
금정산은 곳곳의 수많은 암석들로 마치 산 자체가 산성을 이루는 것 같다. “천 마리의 거북, 만 마리의 자라(千龜萬鼈)”가 뒤덮고 있는 형상이라는 금정산.
백두 준령이 뻗어 내려오다 마지막으로 솟구쳐 오른 금정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명명(命名) 내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가 3장(丈) 가량이다. 그 위에 샘이 있는데 둘레가 10여 척이고 깊이는 7촌(寸)쯤 된다. 이 샘에는 늘 물이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이 샘에서 놀았다고 하여 산 이름을 금정산(金井山)이라 하고, 또 이로 인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범어사(梵魚寺)’라 했다고 한다.”


금정산 능선을 타고 앉은 산성은 산을 가로지르는 장대함이 압권이다. 우리 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답다. 너무 넓어서 관리가 어려워 후에 성 가운데 남북을 구분하는 성벽을 쌓았다고 하니 그 말만으로도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 금정산성 남문
ⓒ 부산 금정구청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 (1703)에 국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해상 방어 목적으로 축성되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졌고, 성벽은 자연석으로 쌓았지만 중요한 부분은 가공한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다.

처음에 산성을 쌓은 것은 확실치 않으나 효종 6년(1655)에 동래부사 임의백이 이 산성을 다시 쌓고 부치(府治)를 옮기자는 건의를 한 바 있으며, 또 현종 8년(1667)에 통제사 이기형이 성터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을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산성은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보이는 중요한 곳에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성임이 확실하며, 성의 크기나 성벽을 쌓은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한반도 남녘 관문인 부산 동래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첫 상륙 지점이자 거센 항전과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지역이다. 또한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적의 교두보로서 수난을 계속 당한 곳이기도 하다(금정산성 전돈대지 발굴조사개보). 따라서 금정산성은 험준한 산세를 낀 지리적 배경, 군량의 생산 조달이 쉽고, 장기전에 대비하는 방비의 목적 등으로 축조된 산성이다.

▲ 금정산성 동문
ⓒ 부산 금정구청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된 것은 숙종 29년(1703) 동래부사 박태항에 의해서이다. 숙종 33년(1707)에는 성이 너무 넓다 해서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성을 쌓았고,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폐성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순조 7년(1807) 수축공사로 동문을 준공하고, 이듬해에는 서·남·북문의 문루(門樓)를 완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까지 동·서·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 북문을 복원하였다.”(문화재청)

▲ 금정산성 제3망루. 주변 경관이 뛰어나다.
ⓒ 부산 금정구청
천 마리 거북, 만 마리 자라가 지킨다

동문에서 3망루로, 다시 4망루로, 북문으로 나아가는 동안 가까이 혹은 멀리 경계 근무중인 기암 초병들을 만난다. 임무 교대도 없이 저렇게 묵묵히 직무에 열심인 천구만별(千龜萬鼈)들. 놀랍다. 눈에 비친 자연의 형상이 내 속에 어떻게 들어앉는지를 더듬어 보는 것.

안내판 문구를 외거나 설명을 적는다고 하여 제대로 배우는 것은 아니리라. 하나의 목적 아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 이유를 고스란히 내맡긴 저 기암절벽 끝 제3망루. 나는 내 몸을 다 맡길 목적 하나라도 있는가. 반문은 때로 화살이 되어 심장을 관통한다.

▲ 금정산성 제4망루
ⓒ 부산 금정구청
여기서부터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나무들이 드물면서 동쪽으로 완벽한 조망권을 확보한다. 제4망루 앞의 억새밭은 제주도 서부산업도로 경마장 근처, 한라산 중턱에서 해안 쪽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며 펼쳐지는 장대한 억새밭을 연상시킨다. 의상봉 근처에 이르니, 몸을 자주 쓰지 않은 탓에 무리가 온다. 진부득(進不得) 퇴부득(退不得)의 상태. 그냥 주저앉아 쉰다. 삶 자체가 진부득 퇴부득의 행로가 아닌가. 잠시 쉬어가는 것도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한 가지 방법.

걸음을 재촉하여 금정산성 네 개의 성문 중 가장 ‘투박하고 거친’ 북문에 닿는다. 직사각형의 비교적 좁은 북문. 고당봉까지는 불과 1k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러나 고당봉행은 암석으로 인하여 산행이 쉽지 않다고 한다. 여기에서 고당봉을 올라도 좋고 범어사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여도 좋다.

▲ 금정산성 북문
ⓒ 부산 금정구청
하산길에 들러가는 천년 고찰 범어사

금정산 금빛 바람 한 줄기 앞섶에 품고 범어사 쪽으로 내려온다. 곳곳에 쌓인 낙엽이 발에 밟힌다. 그 소리가 마치 나에게 묻는 말 같다. 산성에 올라 무엇을 보았는가? 오래 되고 긴 성벽이었는가? 아니면 산성이 투영해낸 시간이었는가?

범어(梵魚), 하늘나라의 고기. 그래, 더러움이 없는 깨끗한 물고기. 나는 아직도 밖으로만 나도는 마음을 잡아다 내 안 좁은 못에 놓아기르지 못하는 범인(凡人)이다.
그게 무참하여 계곡 찬물에 손을 담그고 오래 있어 본다. 세심(洗心)하듯.

덧붙이는 글 | <금정산성 가는 길>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남문, 동문에서 시작하여 북문, 범어사로 하산하는 경우에는 지하철 온천장 역에 하차, 산성마을 행 버스를 이용하여 동문 혹은 남문입구에서 내린다. 범어사를 거쳐 산행을 하는 경우에는 범어사 역에서 하차하여, 범어사행 버스를 이용한다.
문의 : 금정구청 문화공보과 051-519-4061

* 사진자료는 부산 금정구청에서 제공하였습니다.
* 이 기사는 한국토지공사 사외보 <땅이야기>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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