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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맹자의 성선설이 맞을까?, 순자의 성악설이 맞을까? 책의 끝 무렵에 작가는 성선설을 말하고자 할 것인가, 아니면 성악설을 말하고자 할 것인가, 아니 어쩌면 작가는 이 둘 다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혼자서 이 오래된 문제를 새삼스레 떠올렸다.

며칠 전 친구 아기의 돌잔치에 다녀왔다. 이제 갓 일년을 산 아기의 얼굴에서 그 누가 성악설을 떠올릴 수 있을까. 할머니에게 안기려고 그 작은 팔을 뻗어 올리고, 엄마의 품에 안기어 쉴 새 없이 맑은 웃음을 흘리는 아기의 얼굴에선 악한 그림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성선설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갖가지 행위는 옳고 그름, 양면을 다 가지고 있고, 그 사실만이 진리중의 진리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나쁜 면을 보기도 하고, 배우고, 또 직접 하고, 그리고 뉘우치기도 하고, 혹은 나쁜 행동들이 일상화되어 미처 뉘우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런 과정이 삶의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는 마루야마 겐지의 장편소설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마루야마 겐지의 첫 번째 소설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작품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많은 얘기가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백주 대낮의 긴지’라고 불리는 야쿠자가 있다. 하품을 씹어 삼키는 무사안일하기만 한 세계를 경멸하고, 안정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것만이 훌륭하게 보낸 일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 ‘백주 대낮의 긴지’는 어느 날 양대 야쿠자 세력의 1인자들을 죽이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몇 년 전 문신을 지우는 고통을 참아내면서까지, 평범하게 살겠다고 야쿠자 세계를 떠난 옛 부하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부하가 알려준 100m높이의 낡은 탑에서 숨어 지내게 된다.

첫 줄거리만 대략 적어보았다. 어쩌면 그냥 그렇고 그런 조폭이야기가 그려질 듯도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말하듯, 살인사건이나 언론이 좋아할 그런 사건에 문학적인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아마추어의 발상이라고 한다. 그런 사건은 어디를 봐도 새로운 점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 소설은 당연히 야쿠자의 잔인한 폭력이나 배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인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소설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사람들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만 이 문제를 성악설이냐, 아니면 성선설이냐라는 고리타분한 문제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과연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잔혹하게,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질렀던 긴지는 과연 성선설을 대변하느냐, 아니면 성악설을 대변하느냐 하는 것이다. 5살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옛 부하의 작은 딸아이는, 죽은 사람을 보고 냉정하게 삽을 챙기는 그 아이는, 과연 성선설을 보여주느냐 성악설을 보여주느냐는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작가가 이 잔인무도했던 백주대낮의 긴지를 개과천선하게 해서 살려주느냐, 그래서 새롭게 떠오르는 야쿠자의 1인자가 되게 하느냐,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잔인한 살인자로 인정해서 냉정히 죽이느냐가, 어쩌면 가장 큰 관심사인지도 모르겠다. 그 문제의 해답이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의 결론일 수도 있었을 테고 말이다.

일본의 작은 어촌 마을, 어쩌면 지도상에 있는지도 없는지도 잘 모르는 그런 낡고 후줄근한 바닷가 마을. 전쟁 이후론 역시나 있는지 없는지 눈에 띄지도 않는 낡은 탑과 쓰레기 더미를 쌓아놓은 것 같은 옛 부하의 집이 이 소설의 무대다. 더도 덜도 없이, 그 작은 공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어지는 소설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선 굉장한 블록버스터 한 편을 본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 슬픔도 아닌, 그렇다고 기쁨도 아닌, 뭔가 삶의 깊이를 한 뼘쯤 파고 들어간 것만 같은, 그래도 여전히 답은 보이지 않는 그런 가슴 뻐근함 같은 거 말이다.

소설가란 이야기꾼이 아닐까. 그렇다면 마루야마 겐지는 인간의 본성 저 깊은 밑바닥까지 꿰뚫고 있어서, 가장 적당한 곳에 가장 적당한 인간 본성 중 하나를 끄집어내어서 끼워 맞출 수 있는 그런 이야기꾼이 아닐까 한다. 마루야마 겐지의 이야기를 꼭 들어보시길 권한다.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 상

마루야마 겐지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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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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