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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 집 거실 한쪽에는 쌀자루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쌀자루. 다른 때 같으면 그 쌀자루는 집에 들여오자마자 아무 생각없이 베란다 한쪽에 내다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저 쌀자루는 거실에 놓여진 지 벌써 나흘이 지났는데도, 쉽게 베란다에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쌀자루.
ⓒ 한명라
지난 수요일(3월 15일) 오후, 아버님의 부름을 받고 남편은 시댁에 갔습니다. 시댁에 도착한 후에야 아버님은 자식을 부른 이유를 설명하셨고, 남편은 아버님의 담당 의사선생님과 상담하면서 아버님께서 한시라도 빨리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님 CT촬영 사진과 소지품을 간단하게 가방에 꾸려서 아버님을 자식들이 살고 있는 창원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신 아버님은 곧바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고, 그날 오후 곧바로 2시간에 걸친 뇌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수술은 생각보다 잘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수술경과를 지켜보는 가운에 서서히 기운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 할아버지와 손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합니다.
ⓒ 한명라
수술을 해야 한다는 아버님을 모시고 오던 날, 남편은 쌀자루 하나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왔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님께서 아주버님과 큰댁으로 떠나신 후, 트렁크에 실린 쌀자루를 내리느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저는 평소보다 몇 배나 힘들게 실랑이해야 했습니다. 겨우겨우 손수레에 무거운 쌀자루를 실었고, 그 손수레를 끌고 지하주차장을 올라오느라 아들아이는 몇 번이나 멈춰서서 가쁜 숨을 몰아 쉬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는 번쩍 들어올릴 수 있을 만큼 만만했던 쌀자루의 무게가 예전보다 훨씬 무거웠던 까닭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버님께서는 당신이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해야 한다면, 어쩌면 입원을 해야 하는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쌀을 자루에 꾹꾹 눌러 담으셨을 것입니다.

지난해 아버님 손으로 직접 농사를 지으시고, 나락 상태로 자루에 담아 두었다가 자식들이 식량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방아를 찧어주시는 아버님이십니다.

다른 자식보다 유난히 쌀을 많이 먹는다는 막내아들네. 지난번 설에 쌀을 가져갔기에 지금쯤은 쌀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고 짐작을 하신 아버님께서는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무거운 나락자루를 정미기계에 부어가면서 방아를 찧으셨을 겁니다.

한시가 급하게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선생님 말씀이 있고 나서, 그때야 자식에게 별일이 아니지만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잠시 다녀가라고 하시던 아버님.

당신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한동안 자식의 식량을 챙겨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아버님은 아픈 몸 상태에도 방아를 찧어 쌀자루를 준비해 놓고, 당신 아들을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당장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임에도, 그 아픈 몸으로 손수 방아를 찧으셨을 아버님. 평소보다 더 무거운 쌀자루를 준비해 놓고 아들을 기다리셨을 아버님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마음 한켠이 저려옵니다.

아버님의 속 깊은 사랑을 어찌 제가 감히 짐작이나 하겠는지요.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버님의 사랑을 오래도록 제 마음에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에, 쌀자루가 우리 집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선뜻 베란다에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이번 봄에는 엄마 군자란과 새끼 군자란이 사이좋게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 한명라
우리집에는 해마다 이맘때면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리는 군자란이 있습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군자란은 베란다 한쪽 귀퉁이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엄마 군자란 옆에 2개의 새끼 군자란이 싹을 틔웠기에 다른 화분으로 분가를 시켜주었습니다. 엄마 군자란과 새끼 군자란이 사이좋게 앞을 다투어 꽃망울을 터트리는 모습이 정말 좋아 보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군자란이 한발 먼저 달려와서 소식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부디 아버님께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실 거라고, 그리하여 자식에게 보내는 쌀자루에 꾹꾹 눌러 담던 당신의 사랑을 오래도록 나누어 주시기를 이 작은 며느리는 욕심을 내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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