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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 꿈이있는세상
"사람의 입장에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이 천한 것이 된다. 하지만 만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한 것이 된다. 이런 이치로 볼 때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나 만물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밑바탕을 이룬 성리학의 개혁을 꿈꾼 홍대용의 <의산문답>(이숙경·김영호 공저, 꿈이 있는 세상, 2006)에 나오는 말이다.

18세기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지도 100년이 넘어섰지만 그야말로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농업에 국가재정의 바탕을 두고 있는 조선은 왜란과 호란 이후 황폐해진 국토를 복구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당연히 정부는 백성들의 생활안정에 힘을 기울여야 했고, 나라 살림을 위해 조세 기반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정부 관리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기에 바빴다. 임진왜란 직후 54만 결이던 토지가 숙종 대에는 140만으로 늘어났고, 이앙법의 시행으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양반과 소수 자영농 밑에서 빌어먹고 사는 가난한 농민들의 살 길을 열어주는 게 관리들이 할 일이었지만, 정부 관리들은 붕당정치 속에서 정권 장악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당시 기득권층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실학의 활용이 그것이었다. 이를테면 농촌을 토대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유형원과 이익,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의 발전을 이루려했던 홍대용과 박지원, 그리고 우리의 역사, 지리, 문화 등을 연구하여 우리 자신을 재인식하려고 했던 이수광과 안정복 등이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에 모든 것을 사람의 중심에 놓고, 역사와 사람을 주도하고 예와 의와 신을 강조했던 성리학적 사상 기반을 크게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홍대용이다. 노론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양반이자 주력세력의 가문에 속했지만, 그의 눈에 비친 당시의 정치권은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의산문답>을 통하여 성리학에 기반을 둔 양반들의 의식전환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의식을 바꾸지 않는 한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진정어린 고뇌에 찬 산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 책은 두 사람의 대화로 기록돼 있다. 이를테면 꾸며낸 인물인 '허자'와 '실옹', 그 두 사람이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돼 있는 것이다. '허자'는 당시의 전통적이고 세속적인 학문에 얽매인 성리학자를 대표하고, '실옹'은 서구의 새 지식을 받아들인 실학자를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홍대용은 이 책을 통해 성리학의 거짓된 예의와 학문적 한계를 지적하려 했고, 천문 지리와 천체의 운행을 통해 인간과 만물의 관계와 상호작용, 그리고 중국 중심의 화이관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당시 조선사회의 중국숭배사상을 과감하게 꼬집고 파헤치려 했던 것이다.

"땅이 해를 가릴 때에 월식이 되는데, 가려진 모습이 또한 둥근 것은 땅의 모습이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식은 땅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글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도 자기 얼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느냐?"(61쪽)

이는 당시만 해도 지구가 둥글지 않고 네모지기였다는 생각을 깨부수는 일이었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기에 지구는 가만히 있고 태양계가 돈다는 천동설에도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밑바탕에는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인간중심 사상인 성리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부 관리들과 일반 백성들 간의 차이를 나타내며, 그것으로 인해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지주와 농민 계급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대용이 주장한 월식과 일식, 지구가 둥글다는 것, 그리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은 그런 성리학적 사상에 일대 혁명을 가져 온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사람과 사람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결국 그는 조선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양반중심의 신분제도가 잘못되었기에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셈이었다.

"공자가 주나라 사람이고 춘추란 주나라 책이므로 안과 바깥에 대해서 엄격히 한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지만 만약 공자가 중국이 아닌 다른 곳, 즉 오랑캐 나라에서 살았다면 중국 법을 써서 그곳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나라 도를 국외에 일으켰을 것이라는 역외춘추(域外春秋)를 주장하였다."(168쪽)

또한 그는 중화중심의 화이관도 잘못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오랑캐라 여겼던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 한족이 망한 것은 사람들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멸망해 버린 중국의 한족 사상에 얽매여 명분이나 내세우려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중국이 지구의 중심이 아니며,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 각자의 풍속에 맞춰 살아가는 모습 또한 당연하다고 여겼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겉모습이 18세기 조선과는 다르지만, 분명 속내와 그 현상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경제, 과학 등 여러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도시와 농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세계화와 반세계화 등등 보수와 진보를 떠나 엄청난 양극화의 갈등이 남아 있다. 더욱이 새로운 화이관 즉, 미국중심의 세계관만도 찬미하고 있으니 그 또한 문제 거리이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그것을 준비하고 대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리다툼에만 더 밝다.

결국 <의산문답>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의식개혁이 선행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나 싶다.

이는 사람과 자연과는 차별이 없기에 무분별하게 깎고 자를 것이 아니라 자연을 소중하게 다루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친 자연 환경 사회를 만드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차별이 없기에 학벌이나 출신과는 무관한 사회 진출 기회가 제공되는 나라로 만드는 것, 농촌과 도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세계화와 반세계화 등의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우리나라가 명실 공히 살고 싶은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미국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기에 그 속에서 공익사회를 헤치는 것들은 반면교사 삼고, 아시아와 여러 유럽사회의 좋은 점들을 진면교사 삼아 더욱 좋은 것들을 우리 사회가 수용하여 새로 고쳐 쓸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것, 그런 의식개혁이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의산문답 -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홍대용 지음, 이숙경.김영호 옮김, 파라북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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