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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권영길 의원은 28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두번의 대권 도전 과정에 담긴 비애를 털어놨다. 바로 '사표론'이다. 그는 "미CIA 앞잡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며 진보정당 후보의 자부심과 확신 속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는 논리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다음은 관련 내용 일문일답이다.

- 이번에는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면 사표다'라고 하고 있다. 과거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이제는 열린우리당에게 가는 표는 사표다. 열린우리당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당이 해체되기 때문에 그렇다. 없어질 정당에 던질 표야말로 사표 아닌가. 정동영 의장의 정계개편론은 사실상 당 해체를 전제한다. 한나라당의 싹쓸이를 못막아서가 아니라 열린우리당은 이미 해체를 계획하고 있다.

1997년 대선에서 권영길은 33만표를 받았다. 이인제 당시 후보는 500만표를 받았다. 그 33만표는 살아서 민주노동당을 창당을 시키고 2004년 10명의 의원을 국회에 보냈다. 그런데 당시 권영길에게 가는 표는 사표라고 했다. 권영길이 100만표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나라가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인제 후보의 500만표는 완벽하게 죽었다.

열린우리당에 지금 가는 표가 그렇다. 그 이탈표가 우리에게 오면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성과를 거둬내는 것이다. 희망의 씨앗은 뿌려졌고 앞으로 큰 숲을 이루게 될 표다. 열린우리당으로 가지 말고 민주노동당으로 결집하길 바란다. 국민들은 아직 민주노동당이 집권할 정당이라고 보지 않지만 희망을 걸고 있다."

- 진보정당에 진 빚을 좀 갚으라는 얘기인가(웃음).
"(웃음) 그렇다. 언젠가 글로 쓰려고 했는데 얘기를 좀 하겠다. 대통령 선거를 두 번 치르면서 정말로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 97년 대선 때는 배제된 후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거친 황야를 지나는 심정이었다. 호남에선 야간에 민주노동당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 때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 전신) 후보는 끊임없이 누구의 프락치, 심지어 미CIA 앞잡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토론은 물론 언론보도에서도 배제됐다. 진보정당의 목소리는 전달되지 않았다. 유권자는 완벽하게 모르는 후보였다. 선거운동 방법도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권영길이 김대중 떨어뜨리려고 나온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진보정당 후보에게 표를 찍어야 된다는 얘기가 나왔다. 대체로 100만표는 무난할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33만표였다. 결과적으로 70만표가 올 것이 못왔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사표심리다. 많은 지식인, 시민단체들이 이번 97년이 마지막이라고 그랬다. 다음 번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진보정당 후보에게 투표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2002년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더 심했다. 한나라당 후보만은 막아야 한다는 논리다. 우리 운동원들도 그랬지만 후보 자신이 받는 압력은 대단했다. 권영길이 김대중과 노무현의 당선을 가로막는 게 아닌,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 이러다가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면 나는 어떡하지? 선거개표 끝날 때까지 그게 가장 괴로웠다.

97년 권영길에게 미안하다고 했던 사람들이 2002년에 와서 더 강하게 사표론을 제기했을 때 그 비애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2002년 대선 막바지 광화문에서 유세를 했는데 압박감과 소외감, 우리 운동원들의 열정적 운동이 모두 맺혀 나 혼자 피눈물을 토했다. 권영길에게 100만표가 와도 노무현의 당선은 확실한 거였다. 그런데 '정몽준 선언'으로 100만표를 또 넘어서지 못했다. 이른바 '유시민의 사표론'이 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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