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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향수'와 같이 충북 옥천에는 실개천이 많고 물이 깨끗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향토음식으로 올갱이국이 유명하다.

▲ 술 먹은 다음날 해장에 좋은 올갱이국. 구수한 국물과 매콤한 김치의 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 최장문
점심을 먹고 처음 도착한 곳은 고인돌 선사 유적지였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만큼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이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옥천의 고인돌은 큰 밥상처럼 평평했다. 옛날부터 가뭄이 심하면 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된 지역에서 옮겨진 고인돌.
ⓒ 최장문
▲ 고인돌 뒤에 뽕나무의 오디가 검은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답사의 덤으로 오늘은 무공해 오디를 먹을 수 있었다.
ⓒ 최장문
고인돌 아래 팽나무 밑에는 평상이 있었는데, 베개처럼 생긴 둥근런 것이 있었다. 몇 년 전 농민에게 지급한 건강 발명품이라고 했다. 반평생 논밭에서 꾸부리고 앉아 일하다 보면 어느덧 허리가 꼬부라지기 십상인데 이때 이동하면서 편히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 착용하기도 간편하고 이동하면서 앉기도 편리했다. 누가 발명한진 몰라도 시골 노인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았다.
ⓒ 최장문
5분 정도 거리에 선돌이 있었다. 마을 어귀 등에서 잡귀, 전염병 등을 막는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선돌을 '할머니'라 부르며, 때때로 간소한 제사를 올려 소원을 빌기도 한다고 하였다.

중간 부분에 지름이 90cm 되는 둥근 원의 무늬가 있다. 노동력이 중시되었던 농경사회에서 출산과 관련된 임신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선돌 역시 고인돌과 같이 대청댐 수몰지역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생활은 편리해졌을망정 선돌과 같은 소박한 공동체 마을 문화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 선생님들은 한번씩 만져보며 셋째를 말하기도 하고, 아들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과연 효력이 있을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오른쪽 사진은 옥천향토자료 전시관에 탁본되어있는 선돌과 용암사 마애불이다.
ⓒ 최장문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옥천 변두리에 있는 조헌(1544∼1592)의 묘소였다.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갑사의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에서 싸우다 전사한 조헌. 금산 전투와 700의 총으로도 잘 알려진 조헌의 무덤은 금산 700의 총이 아닌 이곳 옥천에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잡초가 무성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끓어진 빈집 같았다.

▲ 조헌 사당과 묘소
ⓒ 최장문
박정희 정권 때는 아산 현충사, 금산 700백의 총, 옥천 조헌 사당이 하나의 청소년 교육장으로 사용됐고, 상당히 세력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현충사 옆에 있는 충무 교육원은 1970∼1980년대에 전국의 중·고등학교 반장, 부반장들이 입소하여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의 5남매 또한 1990년대를 전후하여 모두 현충사에서 찍은 수학여행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현재 옥천에서는 '지는 조헌, 뜨는 지용'이란 말이 있다고 한다. 한때 월북시인이라고 지역에서 금기시 되던 정지용이 21세기를 맞이하여 소위 '떴다'는 것. 그래서 옥천과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과거의 진실은 하나일 텐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뜨고 진다는' 것이 허망하게 생각되었다.

▲ 정지용 거리와 기념관.
ⓒ 최장문

덧붙이는 글 | 오는 8월 15일 <옥천신문>과 언론관련 단체 등이 준비하는 제4회 언론문화제가 옥천에서 개최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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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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