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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는 피크(Peak), 즉 봉우리를 의미한다. P1에서 P23까지 직선거리는 약 2km 거리다. 그러나 바위를 타고 오르내려야 하는 암벽등반에서 직선거리는 의미가 없다.
ⓒ 코오롱 등산학교
오랜 꿈, 울산바위

마침내 울산바위를 등반하게 되었다.

암벽 등반에 입문하기 오래 전부터 울산바위 능선 위에서 비박(바위밑 등 야외에서 밤을 지새는 것)을 하며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는 꿈을 꾸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꿈은 결국 갈증이 된다. 설악산을 드나들 때마다 거대한 암릉을 보며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울산바위 릿지(산 능선) 등반은 아무리 쉬운 길로만 가더라도 하루 이상은 바위 위에서 비박해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특히 매력을 느꼈다. 혹독한 환경 속에 나를 밀어 넣어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한 또다른 '나'와 마주치게 되는 경험.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리던 등반이었다.

거대한, 너무나 거대한 바위

▲ 웅장한 울산바위 전경
ⓒ 이현상
이른 새벽부터 등반을 시작하기 위해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접근한 후 비박을 했다. 밤새 쏟아지던 빗방울이 잦아든 새벽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울산바위는 실로 웅장하기 짝이 없다. 거대한 병풍처럼 버티고 서서 우리를 압도했다.

▲ P1으로 향하는 ‘하나되는 길’의 1피치 구간
ⓒ 이현상
P(봉우리)1으로 오르는 구간은 제법 큰 크랙(바위 표면에 벌어진 틈새)이 형성되어 있다. 손이나 발을 크랙 사이에 끼워 등반하기에는 까다로운 구간이다. 등반 난이도는 5.9에 해당된다. 선등자는 스스로 확보물을 설치하며 지나야 하므로 심적 부담이 큰 구간이다.

▲ 동료에 대한 신뢰와 협동심이 안전등반을 보장한다.
ⓒ 이현상
암벽 등반은 안전을 위해서 반드시 확보를 해주는 동료가 있어야 한다. 혹시 추락하면 땅바닥까지 떨어져 치명적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보자와 서로 자일을 묶어 추락거리를 짧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서로 자일을 묶어 함께 등반하는 동료를 '자일파티'라고 부른다. 서로의 목숨을 담보해주기 때문에 자일파티의 동료애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등반거리가 짧거나 탈출이 용이한 경우가 아닌, 거벽을 등반할 때는 자일파티간의 동료애가 더욱 소중하다.

바위 위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다

▲ 전망대 너머 암릉을 따라 등반한다.
ⓒ 이현상
울산바위 릿지길을 지나려면 수십 개의 봉우리를 반복해 오르내려야 한다. 그중 P6을 지나면 울산바위 전망대를 만났다. 전망대 끝의 난간을 넘어 하강한 후 이어진 암릉길을 따라 계속 전진했다.

전날 퍼붓던 폭우는 멈추었지만 간간이 운무가 용솟음치듯 솟아오르고 이내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갔다. 비에 젖은 바위는 미끄럽고, 계곡에서부터 올라오는 바람에 몸까지 흔들렸다.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 P9 부근의 오아시스
ⓒ 이현상
P9를 지나면 제법 큰 숲지대가 나오고 넓은 바위가 패인 곳에 물이 고여 있다. 이름하여 '오아시스'. 숲지대로부터 흘러온 빗물이 고인 곳이다. 여기에선 풀이 무성하게 자라 산소를 공급하고, 물을 정화시켜 식수로도 이용할 수 있다. 바위 위에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니….

사막 위에서 만나는 오아시스보다 더 오묘한 자연의 조화가 아닐 수 없다. P9 주변에는 텐트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도 있으며 가까운 곳에 오아시스도 있어 비박지로 많이 활용되는 곳이다. 우리는 좀 더 전진하기로 하고 P10으로 향했다.

천길 벼랑 위의 비박지... 나는 박쥐다

▲ P14 부근의 비박지 부근의 누운바위
ⓒ 이현상
빠른 등반을 위해 모든 식사를 행동식으로 대체하기로 한 우리는 따로 식사시간 없이 틈이 날 때마다 빵이며 소시지 따위를 먹으면서 계속 전진했다. 마침내 오늘의 목표 지점인 P14의 비박지에 다다랐다.

오전 7시 30분 등반을 시작한 후 오후 5시 10분에 P14에 도착했으니 약 10시간 만에 목표지점에 다다른 것이다. 애초 계획보다는 조금 빠르게 도착했다.

P14의 비박지는 큰 동굴 형태를 이루고 있고, 바위 틈에 한 두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몇 군데 있다. 우리는 각자 짐을 풀고 바위에 모여 꿀맛같은 저녁을 먹었다. 비박지에서의 저녁은 평온하기만 했다. 모두들 무사히 등반을 마친 것을 축하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모든 게 쾌적할 수만은 없다. 밤 10시쯤 되자 거세게 불어대던 바람은 어느새 비바람으로 바뀌고 동굴 속 잠자리까지 빗방울이 들이쳤다. 입구 쪽의 동료들은 황급히 침낭과 매트리스를 챙겨 더 깊은 동굴 속 바위틈으로 대피했다.

바위 틈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자니 영락없이 박쥐 신세다. 미친 듯 몰아치던 비바람도 새벽이 되자 잠든다. 긴긴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바위 사이 줄타며 등반 마치다

▲ 비박지에서 바라본 전망대쪽 풍경
ⓒ 이현상
비바람이 그친 새벽 설악산의 골짜기에는 운무가 가득했다. 거대한 생물체처럼 운무는 살아 움직였다. 때로는 양처럼 조용히 계곡을 타고오르다가 때로는 용처럼 거세게 능선을 타고 넘었다. 밤새 추위와 비바람에 시달렸지만 다시 출발해야 했다.

▲ P17 하강지점
ⓒ 이현상
간혹 소나기가 쏟아지긴 했지만 순조롭게 진행했다. 첫날보다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각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이다. 이틀 동안 불편한 잠자리에서 밤을 지내고 계속되는 등반에 피로가 누적되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선경과 곧 닿게 될 목표지점을 머릿 속에 떠올리며 이겨내고 있다.

▲ P22에서의 티롤리안 브릿지
ⓒ 이현상
최종 목표지점은 P23을 지나면 있는 마당바위다. 마당바위에서 왼쪽 하산로를 따라 울산바위를 내려간 뒤 계조암 쪽으로 하산할 계획이다.

마지막 구간인 P22와 P23은 티롤리안 브릿지(자일을 타고 협곡을 건너는 방법)를 이용해서 건너가기로 한다. 티롤리안 브릿지는 어려운 등반기술이라기보다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협곡 등을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건너갈 때 사용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걸린 로프를 타고 건너가게 되므로 고도감이 여간 아니다.

▲ P23 마당바위 앞에서 하산을 준비하며
ⓒ 김영남
마침내 전 대원이 마지막 P23을 티롤리안 브릿지로 건너온 후 최종 목표 지점인 마당바위에 이르렀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무사히 등반을 마친 것을 자축했다.

울산바위 릿지등반

해발 873m의 울산바위는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가 4km에 달하는 거대한 암릉이다

울산바위 릿지등반 코스는 '나드리길', '하나되는 길', '돌잔치길' 등 모두 3개로서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록파티산악회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어느 코스를 가더라도 1박2일, 혹은 2박3일 이상 걸린다. 등반장비와 함께 비박에 필요한 막영구, 이틀 이상의 식량과 식수 등을 메고 등반해야 하므로 치밀한 준비가 필수적이다. / 이현상

덧붙이는 글 | 이번 등반은 필자가 활동 중인 알파인클럽 ALPINA의 정기등반 프로그램의 하나였다. 코오롱등산학교 수료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ALPINA(http://cafe.daum.net/korock41)는 등산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두 분의 강사를 모시고 6월 9일부터 11일까지 울산바위 등반에 나섰다. 동행하신 두 분의 강사는 울산바위 릿지 코스 개척의 주역인 록파티산악회의 이종욱, 한동철 두 분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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