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독일 월드컵에서 호주를 16강에 올려놔 명성을 재확인한 거스 히딩크 감독.
ⓒ 남궁경상

"영광, 영광, 영광, 오스트레일리아!"
"사커루 만세!"

'히딩크 매직'이 마침내 호주의 축구역사를 새롭게 썼다. 일본과 맞붙은 조별예선 1차전에서 기록한 월드컵 첫골과 첫승에 이어서, FIFA 랭킹 44위의 축구후진국 호주가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

2006년 6월 23일, 호주의 새벽은 '사커루의 날(Socceroo Day)'로 눈부시게 밝아왔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축구 전사'들을 환영하고 축하하기 위해서 온 세상의 새벽이 호주로 모인 것처럼 환했다.

FIFA 랭킹 44위의 '사커루'가 월드컵 16강!

호주 축구국가대표 '사커루'는 23일 새벽(이하 호주시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독일월드컵 F조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크로아티아와 2골씩 주고받는 공방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 월드컵 사상 첫 16강 진출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일본과의 첫 경기에서 극적인 3-1 역전승을 거둬 호주 축구팬들을 열광시킨 '사커루'는 세계 최강인 브라질에 0-2로 져 16강 진출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크로아티아와 조별리그 최종경기를 가졌다.

16강 진출을 위한 승점 1점을 확보하기 위해서 총력전을 펼친 호주는 3명의 퇴장선수(호주 1명, 크로아티아 2명)가 나오는 격렬한 공방 끝에 무승부를 기록 1승1무1패, 승점 4를 기록하며 F조 2위의 자격으로 16강의 고지를 밟았다.

호주-크로아티아 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오를 수 있었던 호주는 히딩크 특유의 화끈한 공격축구를 펼쳐서 축구가 얼마나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인가 하는 것을 호주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숨막히는 곡예였다.

먼저 '천국'에 이른 팀은 크로아티아였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다리요 스르나의 프리킥이 그대로 호주 골네트를 가른 것. 이후 호주의 줄기찬 공세가 이어지다가 38분에 크로아티아 수비수의 핸들링 반칙으로 얻은 페널티킥을 크레이그 무어 선수가 성공시켜서 1-1 동점으로 전반전을 마쳤다.

후반전에서도 크로아티아는 먼저 행운의 골을 기록했다. 후반 11분 코바치의 중거리 슛을 호주 골키퍼가 어설프게 처리하여 득점한 것. 이후 호주는 수없이 많은 기회를 무산시키면서 16강 진출의 꿈을 접는 듯했으나 후반 34분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주전 스트라이커 해리 큐얼이 골대 옆으로 흐르는 볼을 바운드시키면서 천금같은 골을 기록했다. 스타는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한다고 했던가. 일본 및 브라질 전에서 부진했던 큐얼은 '골든 사커루'답게 침몰해가던 호주팀을 극적으로 구조해 냈다.

호주의 16강전 상대는 E조 1위의 이탈리아.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팀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상대로 16강전을 치러 승리한 바 있는데 이번엔 호주팀 감독으로 이탈리아와 맞붙게 됐다.

▲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클럽에서 호주 시민들이 일본과의 경기에 열광하고 있다.
ⓒ 윤여문
캥거루처럼 물러서지 않는, 축구란 이런 것이다

지구 남반부에 위치한 호주는 지금 한겨울이다. 그런 한겨울의 호주가 축구열풍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16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거리로 뛰쳐나온 수많은 축구팬들의 뜨거운 함성으로 호주의 겨울이 깜짝 놀라서 달아날 지경이었다.

지금 호주사람들은 뜬금없는 '축구사랑'에 흠뻑 빠져들었다. 스포츠가 럭비나 크리켓 밖에 없는 줄 알았던 호주사람들이 마침내 축구의 진수를 맛본 것. 맥 빠지는 수비 위주 축구가 아닌 화끈한 공격형 축구로 박진감 넘치는 축구드라마를 연출한 히딩크 감독 덕분이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히딩크의 작전은 오직 공격뿐이다. 마치 뒤로 걷는 것이 불가능한 호주의 상징물 캥거루와 이뮤처럼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조별리그 2차전에서 맞붙은 세계최강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프랑크 아레나 전 호주 감독이 "작전상 물러나는 것도 축구다"라는 비판적인 언급을 했지만 히딩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 게임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축구를 잘 모르는 호주 사람들에게 '축구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줄 수 있는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호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한 가지 깜짝 놀란 것이 있었다. 주말에 TV를 켜면 온통 럭비중계로 요란스러워서 한 호주사람에게 물었더니 "사커는 싱거워서 보지 않는다"라는 답을 들었던 것.

▲ 12일 밤(한국 시간)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열린 호주-일본 경기에서 연속 두 골을 넣은 호주 케이힐이 자국 벤치로 달려가자 동료선수들이 환호하며 맞아주고 있다.
ⓒ 연합뉴스
전 세계를 떠돌면서 '축구 세계인'으로 사는 히딩크 감독은 "호주의 축구발전을 위해서 '축구가 럭비만큼 박진감 넘치는 경기'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호주 SBS-TV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의 그런 욕심도 선수들의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현 불가능한 것. 그는 '사커루'의 훈련을 체력다지기부터 시작했다. 선수들의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체력훈련을 시키면서 그걸 따라오지 못하는 선수는 과감하게 내쳤다.

그 결과, F조 조별리그에서 맞닥트린 상대팀들인 일본, 브라질, 크로아티아팀 선수들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특히 게임 종료 6분 전부터 스톱워치 타임을 포함한 8분 동안 3골을 내준 일본 팀은 호주선수들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 앞에 스스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야말로 "Never say die!"인 것이다.

게임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면서 호주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숨 막히는 '축구드라마'가 끝나면 히딩크가 인터뷰장에서 즐겨하는 말 두 가지가 있다.

"우리 선수들은 사자의 심장(Lion's Heart)를 가졌다"는 말과 함께 "꿈★은 이루어진다(Dream come true)"라고 말하는 것. 이는 히딩크 축구를 단적으로 요약한 말들이다.

히딩크 감독은 크로아티아와의 게임을 2-2 무승부로 이끈 후 가진 인터뷰에서도 "호주선수들은 끝까지 싸우는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고 '사커루'를 칭찬했다. 그는 이어서 "아주 멋진 경기였고 왜 축구가 재미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경기였다, 호주선수들은 어떤 난관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고 말했다.

히딩크의 이런 칭찬에 화답이라고 하듯, 절체절명의 순간에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트린 해리 큐얼 선수는 "오늘의 경기는 정신력 더하기 체력이 이루어낸 작품이다, 난 오늘 같은 호주팀의 투혼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주장선수 마크 비두카도 "공격 또 공격뿐인 게임이었다, 반대로 수비에 치중한 크로아티아는 페널티 아크에서 실수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해리 큐얼이 환상적인 마무리를 해주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 경기에 2억4천만원, 히딩크는 그럴 자격이 있다"

▲ 호주 일간지 <데일리텔레그래프>에 보도된 히딩크 감독과 동점골을 터트린 해리 큐엘.
잘 알려진 대로 히딩크 감독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그의 조국 네덜란드를 4강에 올렸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개최국 한국을 4강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이뤄냈다. 덕분에 '월드컵 4강 청부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 이번에 호주 팀을 또 다시 4강에 올리면 가뜩이나 천정부지로 올라간 그의 명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것이다.

히딩크 감독의 월드컵 4강 고지를 향한 첫 관문인 16강 진출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걸로 그가 입에 달고다니는 말 '꿈★은 이루어진다'가 성취된 것일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는 짐짓 엄살부터 내비친다.

히딩크 감독이 크로아티와의 경기 전에 "오늘의 경기결과가 월드컵 캠페인의 성공여부를 재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이미 호주는 예상을 넘는 성적을 얻었고 더없이 멋진 축구를 보여주었다"고 말한 것.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어느 팀이 우승을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이기는 게임보다 후회없는(no regret) 경기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박진감 넘치는 공격형 축구를 택한다. 오늘의 호주를 보라.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축구가 호주 최고의 스포츠로 탄생하지 않았는가."

히딩크 감독의 발언이 크로아티아와의 시합에서 패배할 경우를 대비한 '한 자락 깔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호주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변함없이 강조해온 내용인 것을 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축구 세계인' 히딩크의 진정성이 담긴 고백으로 들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는 월드컵 16강 진출의 대가로 받게 될 보너스 약 6억8천만원을 포함해서 천문학적인 보수를 확보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히딩크는 독일월드컵이 끝나면 바로 러시아 감독으로 취임할 예정이다.

독일월드컵이 개막된 이래 호주에서 히딩크보다 귀한 사람은 없다. 축구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언론이 그를 칭송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하물며 존 하워드 호주 총리가 "한 게임에 2억4천만원이라니, 히딩크의 보수가 너무 센 것 아닌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히딩크는 충분히 그만한 자격이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히딩크 감독이 독일로 떠나기 전에 축구팬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때 많은 축구팬들이 "호주 팀의 목표가 16강 진출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히딩크 감독은 특유의 능청스런 웃음을 웃으면서 "조금 더(more)"라고 답했다.

그러자 축구팬들이 "8강이나 4강이냐"고 묻자, 그는 또 다시 "조금만 더(a little bit more)"라고 대답했다. 급기야 "우승이냐"라는 물음이 나왔고, 히딩크는 엄지손가락을 올리면서 "기왕이면 우승까지 가자"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한 히딩크 감독이 막상 16강 진출을 목전에 두고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 축구는 이기는 것보다 멋진 경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다보면 승리가 따라온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동양사상을 많이 익힌 것 같다.

승부를 초월한 화끈한 공격형 축구를 구사하면서도 승리를 이끌어내는 마력의 '축구 세계인'이 축구불모지 호주에서 '축구사랑'의 불을 당기고 있다. 히딩크답지 않은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