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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날 <시드니 모닝 헤럴드> 인터넷 판

월드컵 잔치는 끝났다. 승자는 전설이 됐고, 패자는 4년 후의 잔치를 기약하면서 무대의 뒷전으로 사라졌다.

이번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외형적인 결과 못지않게 짭짤한 성과를 얻은 나라는 어느 나라들일까?

보는 관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32년 만의 본선출전에 이어 당당히 16강의 반열에 오른 호주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호주는 독일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한겨울의 추위(지구남반부의 6~7월은 겨울이다)가 놀라 달아날 정도였다. 월드컵뿐만 아니라 축구 자체에 대해서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럭비와 맥주가 없으면 혁명이 일어날 것 같은 호주'라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로, 스포츠라면 럭비와 크리켓만 있는 줄 알았던 호주에서 온통 월드컵과 축구 얘기로 하루해가 저물었다. 난생 처음 축구중계를 지켜봤다는 20대 여성이 "축구가 날 사로잡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호주당국과 호주축구협회(FFA)는 이런 축구 붐을 활용해서 내친 김에 월드컵 개최까지 꿈꾸고 있다. 2018년 FIFA월드컵 유치를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 2010년 아프리카 개최, 2014년 남미 개최 등 지역 안배 원칙에 따라 2018년의 대양주 개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안된 것이다.

월드컵 이후의 달라진 호주 풍경

▲ 월드컵 스타 팀 케일힐이 자신의 출신학교 어린이들을 상대로 드리블을 하고 있다.
ⓒ TNT 제공
# 풍경 하나 7월 3일 오전, 시드니 서부 백슬리노스 지역에 갑자기 수백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백슬리노스 초등학교에 월드컵 스타 팀 케이힐(26·프리미어리그 에버튼 소속)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6월 12일 카우저슬라우테른에서 열린 F조 조별예선 1차전 호주-일본의 경기에서 동점골인 첫 골과 결승골을 연달아 터트린 장본인이다. 그의 첫골은 호주가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얻은 득점이었다.

15년 전에 백슬리노스 초등학교를 졸업한 케이힐은 후배인 6학년생들을 상대로 20분 짜리 친선경기를 가졌다. 수십명의 후배들에 둘러싸인 상태로 드리블을 하다가 번번이 볼을 빼앗긴 케이힐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너희들이 일본선수들보다 더 잘한다, 난 그들을 쉽게 뚫었다"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후배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난 지각대장이어서 늘 벌을 받았지만, 가장 늦은 시간까지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고 말하면서 "친구들 대부분이 럭비나 크리켓만 해서 혼자서 축구공을 찰 때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영국계 아버지와 사모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 이민자다.

# 풍경 둘 독일 월드컵 폐막을 이틀 앞둔 7월 8일, 시드니 서북 웨스트에핑 잔디구장에는 10여개의 어린이 축구팀이 오전 내내 경기를 벌였다.

오전 8시에 경기를 벌인 노스 라이드 팀과 웨스트 에핑 팀의 경기(10세 이하)는 한겨울의 추위를 녹이고도 남을 만큼 열기가 넘쳤다. 두툼한 외투를 입은 '사커 맘'과 '사커 대디'들도 선수들 못지않게 뜨거운 응원전을 펼쳤다. 비록 10세 미만의 어린이들이지만, 축구장의 규격만 작을 뿐 월드컵과 똑같은 룰을 지키면서 경기를 펼쳤다.

심판의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웨스트에핑 선수들과 부모들이 환호를 올렸다. 전년도 챔피언 팀인 노스라이드 팀을 상대로 2006년 첫 승을 올린 것. 얻은 첫 승의 상대가 전년도 우승 팀이었으니 환호를 올릴 만도 했다. 이런 형태의 축구 열기는 호주 축구인구의 빠른 증가로 이어졌다.

▲ 자신의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응원하고 있는 '사카 맘'과 '사카 대디'들.
ⓒ 윤여문
6월 30일자 호주통신(AAP)은 "사커루가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나가고 16강 진출에 성공하자 호주의 축구선수 등록자가 급증하고 있다"면서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경우 2006년 선수등록자수가 작년에 비해 10~15% 증가해 처음으로 2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2005년에는 1.44% 증가한 18만4245명으로 집계됐다.


열패감 씻은 호주,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호주의 대표적인 정체성 가운데 '열패감'이라는 게 있다. 호주의 수많은 조상들이 죄수의 신세로 모국인 영국으로부터 쫓겨난 처지여서 스스로를 열패자(underdog)로 규정하고 만사를 체념하면서 살았던 것. 그런데 독일월드컵 개막 이후, 호주 사람들에게서 열패감은 온데 간데 없고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면서 온종일 싱글벙글 거린다.

'사커루'가 독일 월드컵에서 거둔 성과를 몇 가지만 열거해도 호주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F조 조별예선 첫 경기인 대 일본전에서 호주는 경기종료 6분을 남겨놓을 때까지 1-0으로 뒤지고 있었다.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터진 팀 케이힐의 동점골이 호주가 월드컵 사상 얻은 첫 번째 골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후 스톱워치 타임 2분을 포함한 8분 동안 호주는 무려 3골이나 작렬시켜서 3-1로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그 승리 역시 호주가 월드컵에서 기록한 첫 승이었다. 이에 한껏 기가 오른 '사커루'는 16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축구불모지 호주에 축구열풍이 불게 만들었다.

호주에 혼쭐난 이탈리아가 우승하다니

▲ 호주-크로아티아 조별예선 3차전에서 '사커루들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한다'는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 호주 응원단들.
ⓒ TNT 제공
월드컵 3회 우승국 이탈리아와 대등한 경기를 펼친 호주로서는 너무도 아쉬움이 남는 한판이었다. 후반 6분 이탈리아의 중앙수비수 마테라치가 퇴장을 당해 한 명이 더많은 상황에서 경기를 치렀기 때문이다. 경기종료 8초 전에 호주가 실점한 장면도 페널티킥을 줄 만큼 큰 파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탈리아 선수 그로소의 파울을 주어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페널티킥의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인 루카스 닐은 호주 채널7 TV에 출연해서 "이탈리아가 독일을 꺾고 결승에 나가는 것을 보니 아쉬움이 더 커진다, 한 명이 퇴장 당한 상황에서 연장전에 들어갔다면 호주가 체력적으로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다, 경기종료 8초를 남겨놓고 페널티킥이라니…"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호주-이탈리아 16강전에서 전반은 이탈리아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후반전에 들어가자마자 이탈리아 수비수 한 명이 퇴장 당하면서 호주의 공격이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주의 줄기찬 공격은 결국 '아주리 군단'의 빗장수비를 열지 못했다.

후반전 내내 우세한 공격을 펼친 호주 팀에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짓는 듯 했으나 여신은 변덕쟁이였다. '사커루'는 마치 고대 로마의 마르쿠스 카토의 탄식처럼 승리의 여신에게 원망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카토 또한 승리를 원했고 기회를 포착하였으며 결연한 의지로 그것을 쟁취하려 온 몸을 던졌다. 그러나 카이사르와의 싸움에서 패했던 마르쿠스 카토가 "승리는 신들의 것이고 패배는 카토의 것"이라고 말했듯, 승리의 월계관은 '사커루'의 것이 아니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히딩크 감독은 "졌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않는다"면서 "호주공격수들에게 '킬러 본능(killer instinct)'이 부족했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 6월 12일 밤(한국 시간) 호주-일본 경기에서 연속 두 골을 넣은 호주 케이힐이 자국 벤치로 달려가자 동료선수들이 환호하며 맞아주고 있다.
ⓒ 연합뉴스
열풍의 중심엔 한국도... 그러나 다음부터는 라이벌

호주 축구 열풍의 중심에 대 일본전을 앞두고 "한국을 위해서라도 꼭 일본을 이기겠다"고 말한 거스 히딩크 감독과 2005년에 호주 최초의 프로리그인 '현대 A리그'를 출범시킨 현대자동차가 자리하고 있어 호주에 사는 호주동포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 주었다.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의 전설에 다음과 같은 박쥐(flying fox)의 얘기가 나온다. 호주의 패권을 놓고 '새의 나라'와 지상 '동물의 나라'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두 나라 사이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박쥐는 아주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보인다.

'새의 나라'가 유리하면 "우린 날개를 가졌으니 새다"라고 주장하다가 '동물의 나라'가 전세를 뒤집으면 "우린 포유동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동물의 나라'에 편승했다. 결국 두 나라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박쥐는 양쪽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공공의 적'이 됐다.

2006년 현재 '사커루'의 처지가 마치 박쥐의 형국을 닮았다. 당장 2006년 말에 열리는 아시안 컵에서부터 아시아 국가들의 맞수가 되어 양보없는 경쟁을 벌여야하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면, 한국과 호주는 이미 1970년대부터 용호상박의 맞수였다.

1973년 11월 13일 그날의 경기도 독일(당시 서독)에서 개최된 1974년 월드컵에 진출하기 위한 사투였다. 아시아·오세아니아 혼성지역에 주어진 티켓 1장을 놓고 한국과 호주가 홍콩에서 맞붙었다.

시드니와 서울에서 벌어진 두 차례 경기에서 한국과 호주는 0-0, 2-2로 맞섰으나 결국 홍콩에서 호주가 1-0으로 이겨 본선에 올랐다. 그날뿐이 아니다. 호주는 1969년 서울에서 벌어진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혼성지역 예선에서도 한국의 발목을 잡았다.

호주는 2002년 한일월드컵 대륙 간 플레이오프에서 우루과이에 밀리는 등 1974년 월드컵 이후 대륙 간 플레이오프에서 번번이 패배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올해 오세아니아축구연맹(OFC)에서 아시아축구연맹(AFC)으로 옮긴 호주는 한국·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과 월드컵 본선 티켓을 다투게 된다.

유럽의 각종 프로리그에 우수한 축구선수를 183명이나 수출할 정도로 전형적인 유럽축구를 구사하는 호주 팀이 마치 박쥐처럼 아시아 국가팀들과 맞붙어서 싸우게 된 것. 그동안 히딩크라는 연결고리 때문에 한국의 '축구 4촌'같았던 '사커루'는 더 이상 우군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상대일 뿐이다.

그러나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한국은 이웃나라인 일본과 맞붙은 호주팀을 응원했고, 호주는 스위스와 운명의 일전을 벌이는 한국 팀을 응원했던 우정을 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선의의 경쟁 속에서 두 나라가 함께 발전해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보다 멋진 기량을 발휘하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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