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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아름다운재단(이사장 박상증)과 공동으로 '활동가와 차 한 잔'이란 제목의 기획기사를 내보냅니다. 바쁜 일상 속에 관심 갖지 못한 사회의 그늘진 곳, 그곳에서 우리를 대신해 희망을 찾는 공익활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과 시민운동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기획입니다. <편집자 주>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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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의 비문해자들을 위한 학교 안남어머니학교는 마을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는 평까지 들었다.
ⓒ 옥천신문

낫놓고 ㄴ자 알기
-지은이 김순자


오십육년 고닫한 내인생
낫놓고 ㄱ자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인연되어 만난 한글학교 바쁜 틈틈이 시간내어
눈을 드드려 합니다
낫놓고 ㄴ자도 알았구요
반지보고 ㅇ자도 알았습니다

김순자 이게 내 이름이구요
박희남 이게 내 금쪽같은 아들이름임니다
내일은 물어보지 않고
버스도 타고 장도 보고
가벼운 발걸음을니다것임니다


ⓒ 옥천신문
지난 2004년 전국 문해·성인기초교육협의회가 주최한 '제2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에 참석한 김순자 할머니의 시다. 낫 놓고 ㄱ자를 알고 반지 보고 ㅇ자를 아는 비문해자들이 상대적으로 농촌에는 많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어렵다 보니 학교를 다니는 것이 어르신들에게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르신 비문해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는 곳은 비영리 민간단체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300여 곳에 이른다. 충북 옥천 안남면의 안남어머니학교도 그 중 한 곳이다.

"심각할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죠. 마을을 순회했었는데 65세 이상 어르신 중에서 2/3 정도가 해당하는 것 같더라고요. 어느 정도 글을 알긴 하지만 자신감이 없어 주저하기 때문에 점점 갈수록 글 쓸 일이 없는 거죠. 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았어요."

안남어머니학교의 송윤섭 교장의 말이다. 안남어머니학교는 2003년 개교 이래 학예발표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 백일장 등 각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위 명문학교다. 올해는 성인문해 교육사업으로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을 받게 됐다.

70여명의 어르신들, 경운기 타고 등교하다

▲ 송윤섭 안남어머니학교 교장.
ⓒ 송선영
"농촌의 2/3 정도가 어르신들인데 그 분들께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하다가 다른 지역에서 비문해자들을 위한 교육을 하는 걸 봤을 때 이거다 싶었어요. 처음 반응이요? 글에 대해 한맺힌 부분을 토로하시면서 굉장히 반가워하시더라고요.

첫 입학날에는 50여 명이 모였고 그 다음에는 10명이 늘었고…. 그렇게 해서 70여 명의 어머니들이 모이게 됐죠. 20~30분 걸어서 학교에 나오시기도 해요. 어머니들 스스로가 자부심과 재미를 느끼시는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안남어머니학교는 마을 전체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어머니학교 수업이 있는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60~70명의 어르신들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모여든다.

학생 기분도 낼 겸 가방과 조끼를 맞춰 입으시기도 하고 심지어 경운기를 타고 등교하시기도 한다. 글을 제대로 안다는 자심감 때문인지 이제는 지역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신다고. 예전에는 면 단위 문화에서 조차도 소외됐던 것이 사실이었다.

송윤섭 교장은 이곳 안남 토박이는 아니다. 1990년 옥천으로 귀농한 이래 줄곧 이곳을 뜨지 않았으니 반 토박이나 다름없다. 제2의 고향인 옥천과의 인연은 장난처럼 혹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론이 아닌 현장에서,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농촌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으로 귀농을 결심했고요. 충복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학생 때 보은으로 농촌활동을 왔을 때였죠. 사실 옥천을 선택하게 된 건…. 지도 보고 막연히 찍었어요(웃음). 지금은 옥천이 고향이 되다시피 했어요."

1990년에 처음 옥천에 와서 송윤섭씨가 도전한 분야는 농민회였다. 농촌운동을 생각하던 사람이 밟는 전형적인 코스를 선택한 것. 하지만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송씨는 농업 문제가 단독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노력해야 하는 문제임을 깨닫게 됐다.

농민운동은 지역 공동체 복원하는 일

어엿하게 교장 선생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지금도 송윤섭씨는 가장 힘들었던 부분으로 농민운동을 꼽는다. 모두가 공감하고 함께 해야 하는 문제인데도 농민운동이라고 하면 과격한 운동단체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인식이 가장 힘들었다고.

때문에 농업 문제는 단순히 농산물 개방 같은 당면 과제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역 문제와 함께 풀어가고 그 과정에서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어머니학교 일 같은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도 신나고 함께 하는 사람들도 자신감 있어 하지만 농업 문제는 진짜 갑갑한 상황이에요. 정권이 바뀌면서 농업문제도 시장 논리에 입각해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도 농촌은 굉장히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런 현실을 도시 사람은 물론 농촌 사람들 스스로가 공감하지 못한다는 게 더 충격이죠. 특히 FTA는 농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농민운동을 하면서 국민적인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안남어머니학교는 2003년 개교 이래 학예발표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 백일장 등 각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 옥천신문

옥천은 안남어머니학교뿐만 아니라 옥천신문, 옥천당 등 활발한 시민운동으로 유명한 곳이다. 바닥이 좁은지라 한 사람이 여러 단체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송윤섭 교장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우선 옥천 농민회 활동을 하고 있고요. 옥천을 화두로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옥천희망연대', 아무래도 먹고 사는 게 농업이니까 '친환경연구회 흙살림', 옥천과 지리적으로 밀접한 대청호 문제를 다루는 '대청호시민연대', 학교급식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옥천군학교급식조례제정 운동본부'…. 좀 많죠? 근데 이름만 달리하는 거지 중복되는 사람들이 많아요. 결국에는 모임 형식만 달라지는 거죠(웃음)."

인구가 6만도 채되지 않는 작은 도시 옥천. 인구에 비례해 봤을 때 옥천 시민단체는 그 양에서나 질에서나 다른 도시를 초월한다. 송윤섭씨는 옥천이 새롭게 태어나기까지 지역 신문의 역할이 컸다고 분석했다.

"지역에서 아무리 활동한다고 해도 주민들에게 알려지려면 결국 매체가 있어야 하거든요. 옥천신문은 다양한 활동을 제대로 짚어주고 홍보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어요."

지도 보고 찍은 제 2의 고향 '옥천'

▲ 안남어머니학교의 신나는 학예발표회.
ⓒ 옥천신문
1990년에 귀농을 했으니 얼마 있으면 이곳 옥천으로 찾아든 지도 20년이 된다. 제2의 고향을 찾고 학교 교장 선생님도 되고 어르신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이쯤이면 지도에서 옥천을 찍은 걸 하늘의 뜻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삶이기 때문에 옥천이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그 과정이 좋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전문적으로 시만단체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죠. 전문가들과 함께 협력하면 더 많은 정책들이 반영되고 좀 더 신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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