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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에 있는 한 직업소개소
ⓒ 허환주
14일 새벽 6시 신촌 로터리 인근 3층 건물에 있는 직업소개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눅눅한 냄새가 풍긴다. 시끄러운 TV 소리. 한가운데 놓인 플라스틱 의자 곳곳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안에서 기다리세요."

무표정한 얼굴의 소장은 한마디 툭 건네고 입을 닫는다. 기다리라는 말은 오늘은 어쩌면 일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직업소개소 안에는 TV에 시선을 꽂은 4명의 남자가 오늘 하루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 TV에서 아침뉴스가 흘러나왔다. 한미FTA 반대 시위 장면이 화면에 잡히자 여기저기서 육두문자가 터져 나온다.

"배부른 놈들이나 저렇게 데모하고 다니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한미 양국 정부간 FTA 협상이나 반대집회는 모두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TV를 보던 사람들 중 몇몇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겨서 일어선다. 건물 뒤편 공터로 내려간 사람들은 버너를 꺼내고 물을 끓이며 한동안 소란을 떤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선착순으로 일을 받기 때문에 이들의 아침은 늘 여기서 해결되기 마련이다. 식사는 라면. 여기에 소주 한두 잔도 반주로 곁들인다. 맨 정신으로는 힘든 일과를 버텨내기 어렵다.

TV를 보며 욕설을 던지고 소주에 라면을 안주 삼아 한 끼 때우는 인력시장 사람들. 왠지 이들은 삶을 포기하고 꿈도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 홍대역 근처에 있는 한 인력소개소. 내부에서 찍은 모습이다.
ⓒ 허환주
신촌의 한 인력시장에서 만난 김아무개(32)씨는 시골에서 2년 전 상경했다.

"농사짓기 싫어 서울에 올라왔죠. 몸은 튼튼한데 이렇다 할 재주도 없고 웬만한 일들 중에서는 가장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막노동을 시작했죠."

웃는 얼굴로 자신의 사연을 말하는 김씨. 큰 체격, 검게 그을린 얼굴. 서울로 오기 전부터 농사일로 단련된 그의 몸은 다부져 보였다.

김씨는 현재 9개월 동안 한달에 하루만 쉬고 계속 일하고 있다. 하지만 피곤한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순박함이 묻어났다.

"아직까지 힘도 좋고 젊기 때문에 힘닿는 데까지 돈을 벌어 많이 모으고 싶어요."

또 다른 일용직 노동자 박아무개(43)씨. 얼마 전까지 택배 운전업에 종사했던 박씨는 택배 배송을 하다가 큰 사고를 내 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결국 이쪽으로 오게 됐어요. 할줄 아는 건 운전밖에 없는데 큰 사고를 내 그쪽으로 갈 수도 없고… 결국 막노동판으로 흘러오게 됐네요."

'막노동밖에 할일이 없다'며 한탄하는 박씨의 눈빛이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자신이 운영하는 술집을 열고 싶다는 게 박씨의 꿈이다.

"돈 많이 벌어 내 술집 차리는 게 꿈이죠. 그런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열심히 일해서 조만간 술집을 차릴 것"이라는 그는 낡은 조끼와 오래된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차림은 왜소하지만 나이 40줄에 막노동을 해가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 그가 작아 보이지 않았다.

▲ 모래네에 있는 인력 소개소
ⓒ 허환주
또 다른 곳 아현 인력시장에서 만난 최아무개(24)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일을 하셔서 먹고 살 정도는 되지만 아버지가 가족들 몰래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린 것이 있어 새벽길을 나선다고 한다.

"학교를 다니고 싶지만 아직 다닐 형편은 못돼요. 빌린 돈을 갚고 등록금 마련할 때까지는 학교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야구모자에 체육복 바지를 입은 최씨는 입술을 질끈 깨물어 보였다.

최씨와 함께 일자리를 기다리는 이아무개(45)씨도 큰 꿈이 있다. 한때 그런대로 먹고살 정도의 인쇄 공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IMF 때 부도를 맞았다. 결국 집까지 팔고 아내와 자식들은 처갓집에서, 자신은 고시원에서 하루하루를 이어나간다.

"이 일을 한 것은 한 반년쯤 돼요. 처음 일을 할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딱히 힘든 것도 없어요. 그냥 빨리 돈 벌어 집을 장만해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 소원이죠."

구두와 정장바지를 입고 있는 그는 일용직 노동과도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옆에 놓인 때 뭍은 가방은 그가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엿보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씩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 빠져나갔다. 일자리가 생겨 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9시가 지나도록 일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힘없이 뚜벅뚜벅 인력시장을 나서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어깨는 처지지 않았다. 내일은 일할 수 있다는 희망, 내일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먼 미래에는 자신의 소원이 꼭 이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을 지탱해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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