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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의 크리스마스' 행사를 알리는 야외 안내판.
ⓒ 윤여문
"해피 크리스마스! 7월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오신 친구를 환영합니다."

지난 7월 22일(토) 저녁 7시, 시드니 서북부에 위치한 <브러시파크 잔디볼링클럽> 입구에서 파티 주최자인 트레버 고리(82)가 반갑게 기자를 맞아주었다. 클럽 안쪽에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귀에 익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지구북반구에서는 여름휴가철의 절정을 이루는 7월의 마지막 주간에 호주에서는 뜬금없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고 있었던 것. 그곳에서는'7월의 크리스마스(Christmas in July)'라는 타이틀의 생소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자선행사를 겸한 파티였다.

거꾸로 도는 계절과 지정학적 고립감

▲ 호주의 7월은 스키의 계절. '호주의 알프스'로 불리는 스노위 마운틴의 설경속에서 한 관광객이 스키를 즐기고 있다.
12월의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집이 아닌 클럽이나 호텔에서 주로 열리는 '7월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어린이들이 참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에 한겨울의 크리스마스를 체험한 50대 이상의 노년층이 주로 참석해서 지구북반구에 있는 모국에의 향수를 달래는 분위기 속에서 파티가 진행된다.

그들은 12월의 크리스마스 시즌에 털옷을 입은 산타클로스 대신 수영복을 입은 산타클로스를 만난 사람들이다. 호주에서는 12월이 섭씨 30-40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이기 때문이다. 그런 계절적 요인이 조금은 '억지 춘향' 격인 '7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낸 가장 큰 원인이 됐다.

그다지 역사가 길지 않은 '7월의 크리스마스'는 호주에서 시작되어 뉴질랜드를 징검다리 삼아 남미국가들로 이어졌다. 몇 년 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전해졌다는 뉴스가 있었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남미국가들은 모두 7월이 겨울의 한복판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호주 밖에서 느끼는 호주의 여러 가지 정체성 중에 '지정학적으로 아시아권에 속하면서 유럽의 문화를 계승한 나라'라는 사실이 가장 큰 항목일 것이다. 반면에 호주 안에서는 '고립된 나라(Isolated Country)'라는 측면이 더 두드러진다.

호주는 거대한 섬이면서 동시에 대륙이어서 '섬대륙(The Island Continent)'라고 부른다. 대륙 하나를 한 나라가 몽땅 차지한 경우도 호주가 유일하다. 총면적 768만2300㎦. 한반도의 35배이고 알래스카를 뺀 미국과 거의 비슷한 크기다.

유럽 면적의 두 배나 되는 드넓은 땅을 차지하고 사는 호주의 인구는 2천만 명을 약간 웃도는 정도다. 인구밀도 또한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여서, 1㎦에 대략 두 명 정도가 살고 있을 뿐이다. 텅 비어있는 대륙인 셈이어서 고립감이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에 한정되는 얘기지만, 바로 그런 고립감이 호주에서 '7월의 크리스마스'가 생겨나도록 만든 정서적 배경이 됐다. 모태/모국에서 멀리 떨어진 고아심리의 정서적 배경과 눈이 내리는 7월의 계절적 요인이 합쳐지면서, 언뜻 생뚱맞게 들리기도 하는 '7월의 크리스마스'가 아주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춤은 기본." 즐거운 파티
ⓒ 윤여문
눈 많이 오는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의 향수병

그런데 그런 고립감이 가끔은 배타적인 인종차별의 정서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지난해 11월, 기자는 시드니 동남부에 위치한 크로눌라 해변에서 발생한 인종폭동을 취재하면서 <2UE 방송>의 제임스 보이스 기자를 인터뷰했다. 청취율이 높은 토크 백(talk back) 프로그램에서 "레바니스(레바논계 이민자)를 호주에서 내쫓자"는 등의 선동적인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모슬렘 지도자인 케이사 트라드를 함께 만났는데, 그가 "호주 라디오방송들이 청소년들 간의 작은 싸움을 인종갈등으로 비화시켰다. 특히 <2UE 방송>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발언하자, 제임스 보이스 기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호주는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그러나 그 방송은 논란의 소지가 많아서 방송국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호주엔 늘 소수민족그룹의 문제가 상존해 왔다. 90년대에는 베트남계, 60-70년대에는 동 유럽계, 40-50년대에는 이탈리아계, 그 이전에는 아일랜드계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렇듯 호주 인종차별의 역사는 아일랜드계를 차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1788년부터 호주로 끌려온 죄수들의 절대다수가 아일랜드계였고, 그들은 앵글로-켈틱이 믿는 성공회가 아닌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양쪽은 같은 기독교이면서 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도 불사하는 앙숙관계였다.

아일랜드는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나라다. 호주로 끌려온 아일랜드계 죄수들이 눈 덮인 풍경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특히 흰 눈이 수북하게 쌓인 크리스마스의 추억은 그들의 노스탤지어를 강하게 자극했다.

그러나 1788년 백인이 호주로 이주한 이래, 아열대성 기후대에 속하는 시드니에 눈이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시드니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블루마운틴에 가금씩 눈이 내릴 뿐이다. 물론 '호주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스노위 마운틴은 연중 약 4개월 정도 스키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린다.

이렇듯 호주전역에서 눈 덮인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꿈이다. 그러나 블루마운틴 지역에 사는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비록 크리스마스 시즌은 아니지만 블루마운틴에 눈이 펑펑 쏟아지는 7월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자고 제안한 것. '7월의 크리스마스'가 블루마운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카툼바 지역에서 시작된 것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향수병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 "당선! 식품 한 광주리" 자선기금 마련을 위한 경품권을 판매하고 있다.
ⓒ 윤여문
'7월의 크리스마스'는 실버 비즈니스?

파티는 크리스마스 만찬으로 시작됐다. 만찬음식은 참석자들이 집에서 만들어온 전통호주음식들이었다. 캥거루고기 스테이크와 감자를 으깨서 만든 신선한 샐러드가 입맛을 돋우었다. 만찬이 끝나자 경쾌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고, 노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하며 각자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고 어울려서 춤도 추면서 지구남반부의 겨울 한때를 즐겼다.

호주에서는 남자 65세, 여자 60세면 대부분 은퇴한다. 그리고 은퇴와 동시에 매주 일정액수의 노인연금을 받는다. 또 노인증서와 같은 '시니어 카드'도 받는데 이를 이용하면 대부분의 공공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일부 업소에서는 일정액을 할인받는다.

게다가 의료비 전액을 메디케어로 커버해주니 호주에서는 은퇴가 경제력 상실이라기보다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 새로운 출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노인들을 상대하는 실버산업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

▲ 수영복 입은 산타클로스 그림
특히 여유 있는 고령자들을 위한 너싱홈이 날로 고급화 추세를 보이고, 노인들을 상대로 휴양 및 관광을 알선하는 기업도 호황이다. 그들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수영, 론 볼링, 볼룸댄스 등을 즐기면서 노후생활을 활기차게 보낸다. '7월의 크리스마스'도 그런 행사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별반 형편이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 노인들이 나서서 조금 더 힘들게 사는 노인을 돕는 모습이 진한 감동으로 전해져 왔다. 경품에 당선되어서 받은 식품 한 광주리와, 파티음식을 장만해온 빈 그릇을 양 손에 들고 있는 카렌 팔머 할머니(76)가 웃으면서 말했다.

"작은 온정도 나누면 배로 커집니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매일 크리스마스지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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