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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 옆에 걸려있는 존 하워드 총리. 왼쪽은 성추문 사건으로 물러난 존 브럭던 의원(자유당 소속).
ⓒ 윤여문
마키아벨리(1469~1527)는 분명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 정치사상가다. 그러나 그의 역사적 평판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모략과 권모술수의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이다.

시드니 시내에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의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 벽면에 호주의 역대 유명 정치인과 현역 정치인들의 사진 20여개가 걸려 있는데, 마키아벨리 바로 옆에 존 하워드 총리의 사진이 걸려 있다. 레스토랑 매니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년 단골손님들에게 의견을 물어서 권모술수에 가장 능한 호주 정치인의 사진을 마키아벨리 옆에 건다. 하워드 총리는 10년째 부동의 1위다."

"진실이 밥 먹여 주냐?"

"하워드 총리를 보라. 현대사회에선 성공적인 정치를 위해 거짓말도 필요하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정치시스템이 이를 증명한다."(노동당 소속 그래함 리차드슨 전 상원의원)

"물론 진실은 좋은 덕목이다. 그러나 호주의 황금시대였던 80~90년대를 망친 노동당 정부를 기억해보라. 진실이 밥 먹여주냐?"(하워드 지지자의 집권 10년 논평)

"호주 국민 35%만 하워드의 말을 믿는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치가로부터 어떤 진실을 원하기보다는 경제안정을 더 원한다."(시드니 모닝 헤럴드 사설)


위는 최근 67세 생일과 집권 10년을 맞은 자유-국민 연립당 소속의 존 하워드 연방총리에 대한 평가다. 야당인 노동당이나 노동조합의 반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지지그룹인 상인과 중산층의 비판에 직면한 하워드 총리는 바짝 긴장해야 마땅하다. 호주의 정치제도인 내각책임제가 책임정치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 하워드 총리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오히려 7월 31일, "호주정치사의 신기록인 5연속 집권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앞뒤 가리지 않는 막무가내 식 '고집불통'의 면모를 그대로 보인 것.

▲ 하워드와 코스텔로의 거짓말 논쟁을 보도한 <데일리텔레그래프>.
공격은 반대그룹만 하는 게 아니다. 하워드 정부에서 10년 넘게 재무장관을 역임하고 있는 (한동안 부총리 겸임) '부동의 정치후계자' 피터 코스텔로마저도 "1994년에 총리직 이양을 약속해놓고 하워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쯤 되면 사면초가다.

그렇다면 하워드는 무얼 믿고 저토록 당당한 것일까? 그가 집권한 지난 10년 동안 호주의 건국이념이면서 국가이념인 평등주의 (egalitarianism)와 선진복지국가 평판이 많이 훼손됐다. 하지만 외형적인 국가경제 지표는 지속적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런 성공적인 국가경제 운용이야말로 하워드를 당당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다.

하워드 총리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답게 눈치 보지 않고 국가이익우선주의와 경제우선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특히 미국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자 노골적인 친미정책을 펼쳐서 영국의 블레어 총리에 이어 '부시의 세컨드 푸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반면에 하워드 정부 이전에 4연속 집권의 기록을 세운 봅 호크-폴 키팅 노동당 정부는 평등, 분배 등의 거대담론에 기대어서 국민들에게 다가갔다. 세계 최초의 실업수당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필두로 노인수당과 평생의료보험제도 및 평생무료교육제도 등을 채택해(1973년 고프 휘틀람 노동당 정부가 최초 도입) 진보정치를 실천한 것. 그러나 과도한 교육복지예산 지출로 국가경제의 악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무려 12년 동안 장기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받는' 세계 최고수준의 복지국가 건설의 기초를 굳건히 했지만, 무역경상수지 악화와 국가부채 증가, 이자율 상승 등의 요인으로 1996년 총선에서 보수정당인 자유-국민 연립당에 정권을 빼앗겼다.

그 과정에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AM라디오 토크백 쇼 진행자인 알란 존스 등의 보수 논객들의 활약이 컸다.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유대계)이 소유한 신문사들의 눈부신 활약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집권 말기의 노동당 정부는 우파 언론들에 의해 '무능한 정부'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다. 보수정당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진실하고 청렴하다는 노동당의 평판도 가차 없이 난도질당했다. 노동당 소속 정치인의 개인비리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국민들에게 "노동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식의 '노동당 혐오감'을 심어주었다.

총선에 보수당의 간판으로 나서서 두 번이나 실패하면서, 장장 12년 동안 와신상담 해온 존 하워드 총리 또한 노동당 정부가 12년간 일구어낸 평등사회의 업적을 교묘하게 폄하하면서, 노동자와 중산층을 현혹시켰다. 시쳇말로 "진실이 밥 먹여 주느냐?"는 것.

▲ '부시의 세컨드 푸들'로 불리는 하워드 총리가 부시 대통령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TNT
평등사회 깨고 '부시의 푸들'로... 양극화 심화

더구나 WTO체제 출범 등으로 국제무역자유화 바람이 불어 1차/3차 산업 위주의 호주경제가 휘청거리자 하워드는 기꺼이 미국의 '동맹/혈맹국가'가 되어서 국가경제를 살려내는 뚝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호주의 오랜 덕목인 평등사회를 무참하게 깨트렸다. 부익부빈익빈이 극도로 심화되어 사회양극화현상을 불러온 것.

사정이 이쯤 되면 노동자와 서민계층의 반발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하워드의 노련한 선거전략 앞에서 그들의 반발은 속수무책이다. 하워드가 비교적 안정된 노동계층과 단순노동직/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계층화를 꾀하여 노동자가 노동당을 외면하도록 만든 것.

2004년 11월 총선이 대표적인 사례다. 집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계층을 상대로 내건 낮은 이자율 유지 공약이 바로 그것. 낮은 이자율만 믿고 거액의 융자를 받아서(주택가격의 95% 이상도 가능했음) 주택을 구입하여 어렵게 중산층에 진입한 노동자 그룹을 협박(?)해서 4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특히 존 하워드 총리가 부동산정책을 선거전략에 이용한 사실은 지금도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2004년 11월 총선 당시 이자율에 관한 네거티브 선거캠페인 하나만 내세워서 승리했다. TV광고나 선거유세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면 이자율이 오른다"는 말만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협박한 것.

그러나 존 하워드가 재집권에 성공하자마자 이자율이 올라 큰 빈축을 사고 있다. 최근에도(8월 2일) 이자율이 0.25% 올랐다. 2006년에만 두 번째이고 총선 이후 3번째 이자율 인상이다. 연방준비은행은 금년 말에도 한 차례 더 이자율이 오를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어, 하워드 총리는 선거공약을 무려 4번이나 어기게 됐다.

하워드는 8월 2일 저녁 TV에 출연해서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했지만, 결과적으로 공약을 어기게 되어 미안하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야당의 웨인 스완 그림자내각 재무장관은 "하워드의 성의없는 사과가 혐오스럽다, 또한 이런 식의 속임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호주 정치의 풍토가 개탄스럽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뻔한 속임수가 통하는 나라

그런 비판은 스완 의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진실한 사회비평가들'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서 거짓이 난무하는 호주정계의 부도덕성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 중에서 주요한 몇 대목을 옮겨본다.

국민들은 정치가로부터 어떤 진실을 원하기 보단 안정을 원한다. 최근 헤럴드와 AC닐슨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그렇다. 현대 사회에서 안정이란 유능한 관리능력에서 나오며 존 하워드 총리만이 가능하다고 유권자들은 믿고 있는 것 같다.

하워드는 오랜 기간 동안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치, 사회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따지는 이번 여론조사 결과가 못마땅할 것이다.

거짓말은 농도가 낮은 식초와도 같다. 얼마간은 참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을 부식시킨다. 진실을 자주 왜곡하는 정부일수록 거짓말에 무심하게 된다. 결국 세상을 비난하던 사람들도 자녀에게 가르치던 진실의 가치에 대해 점차 정치인들의 모습을 따라가게 된다. 결국 반복되는 속임수에 우리 모두는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무엇이 그를 승리하게 만드는가?

▲ 서퍼스파라다이스에서 조깅을 하는 하워드 총리.
ⓒ TNT
8월 1일 실시한 <뉴스 폴>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노동당과 자유-국민 연립당의 지지율이 50 : 50으로 나왔다. 그러나 여야 정치리더의 선호도 조사에서는 존 하워드 총리가 킴 비즐리 노동당 당수에세 53 : 26이라는 더블스코어 차이로 압도하고 있다. 킴 비즐리 당수는 지난 1998년과 2001년 두 차례나 하워드 총리에게 패배를 당한 바 있다.

이자율 상승으로 선거공약을 어기고, 정치 후계자와의 거짓말 논쟁에서도 패배한 하워드 총리가 이렇듯 높은 인기를 유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일부 지식인 그룹은 "호주의 천박함에 할 말을 잃는다, 해외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지만 하워드의 높은 대중적 인기는 엄연한 현실이다.

채널9TV의 정치평론가 로리 오크는 "하워드 총리가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경제안정에 올인 하는 모습이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서민들에게 어필하는 것"이라면서 "굳이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그의 촌사람 같은 친근함"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서 "하워드의 소탈하기 그지 없는 모습에 국민들이 10년동안 중독된 것 같다, 그냥 이웃집 아저씨다, 가끔은 연출된 것으로 보이는 실수(직접적인 증오감 표출·막말하기 등)가 오히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1996년에 호주 유일의 전국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에 보도된 내용이다. 티 가든(Tea Garden)이라는 해변 시골마을 모텔에서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는 동안, 하워드 총리는 아침마다 동네 구멍가게로 가서 신문과 우유의 사들고 덜렁덜렁 모텔로 걸어왔다.

그뿐이 아니다. 막내아들이랑 동네골프코스에 갔는데 마침 클럽멤버들의 시합이 있어서 3시간이나 퍼팅연습을 하면서 기다리다가 겨우 9홀을 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그곳으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이유는 1년 후의 모텔사용을 예약하면 20% 할인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항상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7월 29일 서부 호주 퍼스의 한 정당 행사에서 하워드 총리는 레바논 무장세력 헤즈볼라를 강하게 비판한 후 행사장을 떠났다. 그러자 레바논계 시위대 200명이 그의 차를 둘러싸고 격렬히 항의했다. 레바논계에 대한 호주 국민의 나쁜 정서를 교묘하게 이용한 측면이 강하다.

▲ 레바논 이민자들이 하워드 총리의 차량을 발로 차고 있다.
ⓒ TNT
하워드 총리의 이런 성향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호주의 좌파지식인그룹은 "하워드가 '돈만 벌면 그만이다'라는 식의 배금주의 사상을 호주에 만연시킨 오물 같은 정치인"이라고 몰아붙인다.

21세기를 일컬어 '물질이 정신을 삼켜버린 우울한 시대'라고 한다. 호주국민 네 명 중의 한 명꼴로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것도 시대상황과 무관한지 않다. 이런 천박한 시대정신을 힐난하면서 내뱉은 노암 촘스키의 다음과 같은 절규가 '하워드 시대 10년'을 요약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돈 벌어라! 너 혼자만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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