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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새울에 지는 놀랍도록 화려한 노을
ⓒ 팽성주민대책위
"다른 농촌에 비해서 대추리는 사람이 많은 편이에요. 젊은 지킴이들도 있고… 마을이 북적북적하잖아요."

옆 마을에 살고 있는 평택농민회 이근랑 회장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요. 텅 비어 가는 농촌의 현실을 생각하면 대추리와 도두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아요. 이곳 사람들은 사소한 일들로 다투기도 하고, 가게 앞에서 나눠 먹는 아이스크림 때문에 웃기도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어느덧 마을 청년들이 된 지킴이들도 그런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이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준 주민들의 살가운 마음과 손길을 말입니다.

그런데 8월 29일 오후부터는 하루 종일 마을이 조용했어요. 매일 저녁 7시 30분이면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촛불행사를 국방부 앞에서 하느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셨거든요.

혹시 또 경찰들이 지킴이들을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해 실랑이가 벌어지면 시끄러우니까, 주민등록을 이전하지 않은 지킴이들만 마을에 남았었지요. 그래도 손이 부지런한 청년들은 30일에 진행될 촛불행사 2주년 준비를 하느라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버려진 씨까지 열매 맺게 하는 '대추리'

▲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 열린 손바닥보다 작은 수박과 참외
ⓒ 박진
저는 오랜만의 여유를 누려보고자 어슬렁거리며 대추리를 걸어 보았어요. 평화전망대도 둘러보고, 역사박물관 겸 찻집도 가고, 대추초등학교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을 열심히 닦고 있는 '들사람들'과 인사도 나누었죠. 그러다가 우연히 정말 조그만 수박과 참외를 발견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먹다 버린 수박이었겠죠.

지난 여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뱉은 씨일까, 평화캠프에 놀러 왔던 이의 소행일까. 이곳에는 버려진 씨까지 알뜰하게 챙겨 열매를 맺게 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에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버려진 집에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어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을 꾸몄던 것처럼. 혹시 운동장에 오실 일이 있다면 전봉준 동상과 초등학교 정문 사이의 어디쯤을 잘 찾아보세요. 마음이 맑아질 겁니다.

노을도 참 고왔습니다. 유독 이 마을 노을만 화려할 리 없겠지만, 가끔 평화공원에서 아름답게 지는 노을을 보자면 아찔하기도 합니다. '노을'이라는 동요가 황새울 노을을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래서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를 웅얼거려 봅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더이상 노을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한켠이 저립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 눈이 보배라서, 내 머리가 컴퓨터라서 이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한숨과 이들의 눈물과 이들의 주름진 웃음, 그리고 버려졌다고는 하지만 의연하기만 한 수박과 씨앗들. 낡은 지붕… 조용한 담벼락.

그저 묵묵히 일 잘하는 청년이었던 그

▲ 한적한 대추리 마을의 풍경
ⓒ 박진
지난 8월. 평택 지킴이 오기성씨가 구속되었어요. 대추리에 둥지를 틀어 살고 있던 그는 묵묵히 일 잘하는 청년이라고 마을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던 사람이었지요. 그는 얼마 전까지 연봉 오를 걱정으로 일상을 살던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다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서 스스로 단체 활동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자기가 알게 된 주한미군의 문제와 평화적 생존권 실현을 위해서 마을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지금 특수공무방해죄로 차가운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죠. 그런 그를 위해서 재판부 앞으로 보내는 탄원서를 썼습니다. 내가 이곳에 살고 있는 이유, 그의 심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본 것을, 이미 안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평화가 죄라면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 때로는 우리들의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도 해 봅니다.

평택지킴이 오기성씨 석방을 위한 탄원서

재판장님, 안녕하세요.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이 한풀 꺾여,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렇게 세월은 사람이 가라 오라 하지 않아도 때를 알고 있습니다. 이곳 황새울에 있으면 계절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귀 밝은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요즘 붉은 고추를 따서 볕에 말리고, 배추 모종을 텃밭에 심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자연의 속삭임을 알지 못했던 저는 지금 처음으로 농민들의 심정을 배웁니다. 철조망 너머로 망가진 논을 바라보는 그이들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멈추어 살고 있는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재판장님께 오기성씨의 탄원서를 쓰는 저는 다산인권센터라는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오기성씨와 마찬가지로 국방부의 협의매수에 응하고 고향을 떠난 대추리 주민의 집을 치워서 살고 있는 평택지킴이입니다.

대추리로 주민등록을 이전해서 살지는 않지만, 이미 몇 달 동안 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계절을 보냈습니다. 저처럼 대추리 도두리라는 생면부지의 공간에서 또 하나의 주민이 된 이들을 지킴이라고 합니다.

지킴이들은 어떤 언론들이 말하는 것처럼 붉은 띠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외부세력도, 이념으로 무장한 빨갱이 집단의 구성원들도 아닙니다. 이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사무직 노동자였고, 학생이고, 동화작가였던, 재판장님이 주변에서 흔히 보았던 그냥 보통 사람들입니다. 남다른 것이 있다면 심장의 두께가 너무 얇아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바보같이 착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오늘 제가 석방의 탄원을 드리는 오기성씨에 대해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가 말없이 주민들의 농사일을 도왔고 결국은 마을을 떠나기 싫어서 주민등록을 이전하면서까지 주민이 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그가 보낸 편지를 보고 그가 '2000년까지만 해도 월드컵에 빠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만 즐겁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그저 연봉을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는 지극히도 평범한 직장인'(오기성씨의 8월 9일 편지 중에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되었고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모순을 만드는 중요한 당사자가 주한미군이며, 그들을 고발하지 않으면서 삶의 진정성을 실천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기성씨와 마찬가지로 지킴이로 이 땅을 찾은 이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모두 누군가의 딸이며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형입니다. 그런데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는 가족들의 염려와 때로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볏단을 함께 옮기며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주민들의 절박한 소망을 실현시켜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4일. 국방부는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군사작전을 통해 조그만 마을의 논과 밭에 철조망을 치고 '군사시설보호구역'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팽택 팽성읍 대추리 도두리 일대에 대한 군사시설보호구역 지정의 불법성을 다투는 소송이 진행 중인데도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이곳 주민과 방문객들의 통행을 심각하게 제한했습니다.

설령 철조망 지역이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 하더라도 철조망 바깥에 주민들이 버젓이 살고 있는 마을을, 매일 수십 개 중대가 보초를 서며 이동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공권력에 의한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공무집행이라 하고 이를 막은 오기성씨에게 특수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죄를 씌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경찰과 법이 국민의 편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오기성씨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과 함께 저울 위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저울이 개인의 신념과 양심의 자유를, 국가체제를 수호하는 권력의 무게와 동일하게 저울질할 줄 아는 공정한 저울이기를 바랍니다.

한 손에는 칼을 뽑아들고 한 손에는 저울을 든 법의 여신의 저울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고 있는 재판장님이, 편파적이지 않도록 눈을 가린 그 여신이기를 소원합니다. 법집행을 의미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정의를 위해 쓰여졌음을 증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민족과 진보를 위해 삶을 헌신한 한 청년의 진실한 실천이 재판장님을 통해 사회에 알려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가옥 강제철거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대추리 도두리에는 애타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온 생애를 들녘에 바쳐 온 늙은 농부들의 삶이 이대로 파괴된다면, 우리사회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 것입니다.

아직 '양심의 명령'을 지킬 시간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오는 9월 24일에는 '사람을 먹여 살려온 들녘을, 사람 죽이는 전쟁기지로 만들지 않기 위한' 4차 평화대행진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황새울의 평화를 위해 힘과 뜻을 모아주십시오.

여러분을 9.24 평화대행진 ‘10만 준비위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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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www.righ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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