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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향 집에 갔는데, 여든여덟이신 엄니가 안 계십니다.

'다리도 불편하신데, 참말로.'

혼자서 혀를 끌끌 차면서 문을 나서려는데, 막 엄니가 채소를 한 보따리 안고 들어오십니다.

"혼자 가시다가 넘어져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막내야, 이 물건 좀 보거래이."

내가 퉁을 맨 소리를 하는데도 엄니는 남새(채소) 보따리 속에서 가지를 꺼냅니다.

"내 구십 생전에 이런 귀한 물건은 첨이다. 어떠냐! 신기하지?"
"그 놈, 참 요상스럽게도 생겼네요. 흡사 빗자루를 닮았네요."

'빗자루 가지'라는 내 말에 아내는 '바나나 가지'가 더 어울린다고 주장하고 엄니는 '육손이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흡사 옛날 육손이(손가락이 여섯인 손) 아저씨의 손을 닮았습니다.

▲ 육손이 가지(앞면)
ⓒ 한성수
"막내야! 내 가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신기한 가지 덕분에 마침내 엄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푸십니다.

"옛날에 찢어지게 가난한 산골 처자가 열여섯에 더 가난한 동네에 시집을 갔더란다. 이전에는 처녀가 열다섯만 넘기면 입을 덜기 위해 시집을 보냈거든."

엄니는 가볍게 한숨을 흘리십니다. 당신도 열여섯에 한씨네에 시집와서 73년이 흘렀으니….

"그런데 그 박복한 사람이 시집온 지 네 해만에 그만 신랑이 죽고 말았단다. 그래도 그 새댁은 낮에는 남의 집 밭일을 하고, 밤에는 베틀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베를 짜서 층층시하 시부모와 시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더란다.

▲ 육손이 가지(뒷면)
ⓒ 한성수
그런데 우떤 보리숭년(흉년)든 해, 할 수 없이 이웃마을 부잣집에서 장기쌀(주로 보릿고개 때 빌렸다가 다음해 배로 갚는 고리의 쌀이나 보리)을 내어 먹었제.
다음해 가실이 되었는데도 땅뙈기 한 뼘 없으니 추수할 곡식도 없고 품삯으로 받은 것도 워낙 가난한 살림살이다보니 목숨잇기가 바쁘고 빌린 보리쌀을 갚을 도리가 있어야제. 그런데 그 부자영감이 은근히 그 새댁을 첩상이(첩실)로 마음을 두고 있었능기라."

엄니는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벼를 소 마구간 밑에 구덩이를 파서 넣어두었는데, 흉악한 일본놈은 창으로 쑤셔서 찾아내고는 공출이란 이름을 붙여 앗아갔다"며 가볍게 몸서리를 치십니다.

"그해 겨울에 부자영감이 와서는 '한 칠(일주일) 후가 내 생일이니, 그날 오곡밥에 세 가지 쌈에 백가지 나물을 해주지 않으면 나한테 시집을 와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단 말이지.

시어른들은 '너는 애도 없고 하니 우리 생각하지 말고 팔자나 고쳐라'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새댁은 아무도 돌볼 이 없는 시어른들을 두고 차마 갈 수는 없능기라. 이레가 하루같이 지나고 드디어 생일이 되었는데, 새댁은 새벽에 오곡밥을 지어서는 함지박에 이고 부잣집에 가서는 상을 차렸능기라."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아내는 가볍게 추임새를 넣습니다.

"새댁은 먼저 부자 앞에 앉아서는 조건을 내걸었제. '만약 내가 어르신의 요구대로 해왔으면 시집 이야기는 물론이고 장기 쌀도 탕감해 주겠느냐'고 물으니 부자는 '오곡밥은 어떻게 짓는다 해도 한겨울에 그 살림살이에 어디서 세 가지 쌈과 백가지 나물을 할 수 있으랴' 생각하고 그러마 약속을 했제. 그런데 새댁이 내놓은 것은 오곡밥에 콩잎사귀 쌈에 가지나물이 전부였능기라.

▲ 육손이 가지나물
ⓒ 한성수
부자는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세 가지 쌈'과 '백 가지 나물'에 대해 따졌는데, 새댁은 '콩잎은 세 가지 끝에 달리니 세 가지 쌈이요, 이 가지나물은 하얀 가지로 나물을 무쳤으니 백(白)가지 나물이 아니겠습니까?'고 대답하자 부자는 더 할 말이 없어서 입맛만 다셨고, 새댁은 시어른을 모시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더구나!"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는데, 밥상에 가지나물이 올라왔습니다.

"진짜 한 가지로 만든 신기한 여섯 가지 나물이에요!"

아! 나는 가볍게 탄식합니다. '말려서 보관하려고 했는데….'

덧붙이는 글 | 어머니가 육손이 가지를 딴 것은 8월이며, 이 기사에 실린 육손이 가지 사진 또한 8월에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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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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