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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현승 선생.
ⓒ 안진걸

#질문 1. 인혁당 사건은 '사법살인'?
"75년 4월 8일 대법원 판결을 방청하는 등 현장을 목격한 외신 기자 브라이언 우드워드는 '인혁당 사건 그 후'란 제목의 르포에서 8분의 사형집행을 '박정희의 정치적 모살'이라고 했습니다. …'사법살인'이란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는 되지만, 마치 박정희는 빠지고 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사법부가 주도한 것 같은 뉘앙스를 주어요. 결코 그게 아니었거든요."

#질문 2. 인혁당 재심 선고는 명예 회복?
"일부 언론이 '신원' 또는 '명예회복'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인혁당 사건에 씌운 죄목이 '유신독재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다는 것' '사회적 평등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것들인데. 이게 불명예스러운 죄목이 아니니 '무죄'를 선고받는다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명예회복을 했다면 대한민국 사법부가 하는 것입니다."


20년 형을 선고받고 8년간 복역했던 2차 인혁당 사건의 생존자 황현승 선생의 말입니다. 본의 아니게 큰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겼어도 황 선생의 표정은 평화롭고 겸손합니다. 그리고 당당합니다.

부분적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만 30년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8명은 죽고 나머지 14명도 수십년 감옥을 살았지만, 아무도 이들의 고통을 보상해주지 않았습니다. 과거 '살인'을 했던 자들 역시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부분적 진실을 밝히는 것 말고는 한 치의 진척도 없는 것입니다.

"인혁당 사건은 사법살인이 아니라 '박정희 모살'"

황 선생은 2차 인혁당 사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74년 2차 인혁당 사건 때가 가장 대립과 모순이 첨예화되던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민청학련 사건엔 수많은 관련자들이 있었음에도 인혁당 사건 관련자만 처형한 것은, 박정희 입장에서 보면 자기는 아마 가장 현명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브라이언 우드워드 기자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공포를 보여준 것이죠. 친일 전력자인데다 다가오는 역사의 빛살, 민주주의를 바라는 민중의 열망을 감내할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할까요."

화해.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사 청산과 진정한 화해는 총체적인 진상규명, 그리고 참회와 그에 따른 처벌, 배상까지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소위 '운동권'들마저도 쉽게 화해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황 선생은 "당시 검사가 '네 머릿속에 있는 것도 처벌할 수 있다'고 했고, 바로 이런 것이 국가보안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있는 것을 '사실'로 끌어내기 위해서 고문을 필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보안법도 폐지되고 민주화와 통일이 더 많이 진전돼야 제대로 명복을 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특히 현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개탄했습니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가 부흥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국민들과 노동자들이 정말 뼈 빠지게 일해서 경제가 살아난 것인데도, 우리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박정희의 유령과 싸우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래는 황현승 선생님과의 인터뷰 전문입니다.

"머릿 속에 있는 것도 처벌할 수 있는 것이 국가보안법"

- 2차 인혁당 사건 때 옥고를 치르셨는데, 당시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올해 74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분단과 전쟁의 시기 소년 시절을 보냈고, 전쟁이 끝난 다음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1974년 2차 인혁당사건(인혁당 재건위사건)으로 옥살이를 했습니다."

-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74년도 5월 2일 연행됐습니다. 이수병·김용원 두 선생이 가장 먼저 연행됐는데, 그게 4월 18일입니다. 그렇게 4월 18일부터 5월 초까지 모두 21명이 연행됐고, 이성재 선생은 도피했다가 나중에 잡혔지요. 이성재 선생을 숨겨줬던 장석구 선생이 추가로 연행돼 사건 피해자가 모두 23명이었습니다. 사형을 당한 8분 말고도, 장석구 선생이 옥사했고, 지금까지 의문사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1심인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20년형, 2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어요. 전시도 아닌데 군인들이 재판했고, 그것을 대법원 판사들이 추인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심복 부하에게 살해되고 나서, 1982년 7년 10개월 만에 형 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유기형을 받은 사람들은 그 때 같이 나왔고, 무기형을 받은 사람들은 그 다음해 나왔어요."

- 현재 2차 인혁당 관련자들은 몇 분이 남아 계신건가요?
"23명의 관련자 중에서 당시 7명이 사형당했습니다. 민청학련의 여정남 선생까지 모두 8명이 사형당하셨지요. 나머지 16명 중 7명이 출소 후에 돌아가시고, 이제 9명 남았습니다. 이번 재심 법정에서 32년 전의 악몽과도 같은 기억들을 되살려 모두 힘들게 증언을 해줬어요. 사형당한 분들의 재심은 끝났고, 남은 사람들은 2차로 재심에 들어갑니다. 3월 중에 재심 청구할 예정입니다."

- 일부 언론들은 인혁당 사건을 '사법살인'이라고 표현하는 데, 이런 규정에 동의하십니까.
"사법살인이 아니지요. 당시 법관들이 그와 같은 무도한 판결을 내린 것은 최소한 법의식이나 양심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짓이었습니다. 절대 권력자의 외압이 있었다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어요. 대통령이 아니고 누가 그런 짓을 감히 하라고 할 수 있겠어요."

-사법살인이라는 규정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75년 4월 8일 대법원 판결을 방청하는 등 현장을 목격한 브라이언 우드워드란 외신 기자는 '인혁당 사건 그 후'란 제목의 르포에서 8분의 사형집행을 박정희의 정치적 모살이라고 했습니다. 정곡을 찌른 것이지요. 그는 기사에서 '여기에 사용돼야 할 올바른 단어는 모살이라는 것이다, 공포에 싸여 신경이 날카로와졌으며 게다가 빈틈없는 절대 권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이들 8명을 모살한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사법살인이란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는 가지만, 마치 박정희는 빠지고 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사법부가 죽임을 주도한 것 같은 뉘앙스를 주어요. 결코 그게 아니었거든요."

- 재심 선고를 받았을 때 느낌은 어떠셨어요?
"일부 언론이 신원 또는 명예회복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명예회복도 아니고, 신원도 아닙니다. 씌운 죄목이 '유신독재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다' '사회적 평등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뭐 이런 것들인데. 이게 불명예스러운 죄목은 아니고, 그러니 무죄가 명예회복은 아니죠.

어떻게 말하면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더 철저히 활동하지 못한 게 그 분들에겐 한스러운 것이겠죠. 그래서 그 죄명은 불명예로운 누명은 아닙니다. 오히려 명예회복을 했다면 대한민국 사법부가 한 것이죠. 온 세상이 지탄하는 사법살인(사법부 입장에서만 보면)을 저질러놓고, 이제야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으니 대한민국 사법부가 명예회복을 한 것이죠."

"'유신독재 정부 전복하려 했다'는 죄목이 '불명예'는 아니죠"

ⓒ 안진걸
- 그래도 주변에서 축하를 받지는 않았나요.
"어떤 이들은 축하한다고 하는데, 축하받을 일도 아닙니다.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살아있고, 상황이 바뀌면 제3의 인혁당 사건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니까요. 국가보안법은 실체가 있어야 처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검사가 네 머릿속에 있는 것도 처벌할 수 있다'고 했어요. 바로 이런 것이 국가보안법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사실'로 끌어내기 위해서 고문을 필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보안법도 폐지되고, 민주화와 통일이 더 많이 진전돼야 제대로 명복을 빌 수 있죠.”

- 가해자들이 사과를 한다면?
"그 사람들은 사과를 하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사과를 안 할 것입니다. 박근혜의 경우, 74년 8·15 이후에는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사람이에요. 우리는 연좌제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박근혜가 한 공당의 대표도 지냈고 다음 대선에도 나온다고 하니까. 그것도 유력한 것으로 거론되는 사람이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죠. 거기에다가 아버지의 그 엄청난 죄를 생각한다면.

사실은 그 사람에게 사과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박근혜 입장에서는 자기 아버지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인데, 못 내려놓는 것은 그 사람의 숙명이겠죠. 그걸 내려놓으면 자기 존재가 부정되니까. 박정희의 후광을 부정하는 것이니까요."

- 그럼 도의적 책임이라도 느껴야 한다고 보십니까?
"박정희가 여순사건 때 남로당 군조직의 책임자였는데, 전향을 해서 미국의 정보장교였던 하우스만이라는 사람이 박정희를 복귀시켰습니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가 부흥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국민들이, 노동자들이 정말 뼈빠지게 일해서 경제가 살아난 것인데도, 지금도 박정희의 유령이 판을 치니, 우리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박정희의 유령과 싸우고 있는 현실입니다. 단지, 박근혜 한 개인에게 이야기할 게 아닌 것이죠. 혹시 이명박이면 괜찮으냐? 그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불쾌하다는 수준에서 그걸 이야기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짚어보고 싶어요. 수많은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어요.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철저히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면, 엄청난 반동이 옵니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청산도 제대로 못하는 정부인데, 자꾸 과거에만 얽매인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지 못하면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어요. 지금도 우리 사회에 일제 잔재가 얼마나 많이 남아 있습니까?"

"박근혜 대선 나오면 안 되지만, 이명박이면 괜찮냐? 아니다"

- 인혁당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국가사회도 단일한 집단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어서 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어느 시대에나 갈등이나 대립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지배의 반대물로만 생각해서 이런 식의 엄청난 억압이 나온 것이죠.

아마도 74년 2차 인혁당 사건 때가 가장 대립과 모순이 첨예화되던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민청학련 사건엔 수많은 관련자들이 있었음에도 인혁당 사건 관련자만 처형한 것은, 박정희 입장에서 보면 자기는 아마 가장 현명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브라이언 우드워드 기자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공포를 보여준 것이죠. 친일 전력자인데다 다가오는 역사의 빛살, 민주주의를 바라는 민중의 열망을 감내할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할까요."

- 과거로 돌아가서, 어떻게 2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신 겁니까?
"제가 1934년생입니다. 딱히 계기라기보다는 사람의 개인사도 시대의 무게를 지게 마련인 데요, 우리 세대가 역사적으로 중층적 모순이 쌓인 시대를 살았던 것이죠.

봉건제가 청산이 안된 채 식민지가 되고, 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외세로 인한 분단 상황 등 중층적인 모순이 쌓여왔어요. 소년 시절에 보아온 일제 식민지 상황, 분단, 전쟁, 외세와 독재…. 이런 것들이 사람의 개인사에 끼치는 영향이 있어요. 자꾸 이념이라고 몰아세우는데, 저 뿐만 아니라 많은 평범한 이들이 그런 상황 하에서 의지나 정의에 대한 지향, 민족의식 등 그런 것이 조금은 있었겠죠. 막연하지만, 역사의 방향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57년에 군대 갔다 와서 보니까, 동기들은 다 졸업했고 없더라고요. 60년에 복학해서 4·19가 났고, 우리 후배들이 열심히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역사적 현장인 광화문이나 효자동에 가기는 했었죠. 졸업 후 교원으로 있었는데, 그 때 사형당한 김용원 선생과 같은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게 인연이 됐습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민청학련 선언문, 민중의 소리 등의 유인물을 김용원 선생과 함께 읽어봤다는 것이 전부에요. 그게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이라는 것이죠. 돌이켜보면, 60년대는 민족이라는 말조차도 볼온시하던 시기였어요. 나중에 제가 간 오산학교(창립자 : 이승훈 선생)는 민족이라는 말을 그나마 쓰더군요.

당시 박정희가 69년 삼선개헌한 후에, 71년에 특별조치법이란 것을 만들어 비상대권을 확보하고, 72년 10월에 유신 선언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는데요, 그 후 1년이 지나서야 73년 10월경인가 서울 문리대에서 반유신 투쟁이 처음 터져 나와요. 그러면서 재야·종교 쪽에서 유신반대 움직임이 일어나니까, 74년 1월 유신헌법에 의해서 확보한 긴급조치권을 발동했지요. 1월에 1호, 2월에 2호, 이렇게 잇따라 나왔어요.

그 때 참으로 용감했던 분들이 대구와 서울 쪽에 계시던, 4·19 이후 활동한 혁신계 인사들이에요. 그 무섭던 시절에 그 분들이 이걸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나서신 것이죠. 그러면서 직·간접적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했던 것이고요. 사형당한 여정남 선생이 경북대 학생회장 출신이에요. 이 분이 혁신계 인사들과 교류를 하면서, 서울에 와서 이수병 선생이 가르치던 일어학원을 다니고, 김용원 선생께서도 교사고, 일어도 잘하고 그러니까, 여정남씨를 서울에서 맞이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이런 조그만 활동이 민청학련 배후로 몰린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차비도 주고, 잠도 재워준 것이 배후로 된 것이죠. 당시 민청학련의 실제 지원자들은 재판받은 지학선 주교, 김지하 시인, 윤보선 전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여정남씨가 제일 먼저 채포되고, 그 다음날 이수병·김용원 선생이 체포되고, 그러면서 엄청난 고문을 자행하니까, 사람들 이름이 일부 나오고, 또 연행되고, 연행되고 그게 실체도 없던 2차 인혁당 사건이 된 것입니다."

"5일간 잠 못자며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 안진걸
- 당시 고문을 당하셨나요?
"5일 동안 잠을 안 재우면서, 집중적으로 고문을 받았어요.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그 때 고문했던 사람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로) 저하고 대질신문을 했는데, 시인은 않고 부인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더군요. 전기고문 같은 경우는 기술자가 아니면 못합니다.

그 때 고문한 사람 이름이 박 아무개인데, 그때 영등포경찰서에서 차출되어 보조한 사람이 있었어요. 다행히 전기고문 당하는 것을 봤다고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시인을 했어요. 이번 재심 때에는, 판사하고 단 둘이 이야기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판사가 이야기하라고 말해도 말을 안 해요. 다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국정원과거사위에서 진술한 것에 대해서 수긍하는 방식으로 인정을 하더군요. 공직자로서 자기 입으로 공개된 장소에서는 말을 못하겠다는 것이었어요.

이번 재심과정에선 여러 사람들이 증인으로 나왔는데, 주로 대구 경찰 쪽 대공 업무 관련자들이 나왔습니다. 몇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들이 보기에도 정보부에서 너무 무리하고, 강압적으로 하는 것을 느꼈고, 우리들까지도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다' '우리는 인혁당이라는 말을 묻지도 않았고, 추궁도 안했다'라고 증언을 해주었어요. 정말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 81년도에 출소하셨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82년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해서 사회안전법으로 감시도 받고, 몸도 너무 안 좋아서 우리같은 사람들은 뭐 딱히 할 만한 일도 못 찾고, 뭘 할 수도 없었죠. 저는 어떻게 누가 연결을 시켜줘 의·약 관련 신문사에서 번역 일을 하면서 그렇게 8년을 살았어요. 식품관련 주간지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또 10여년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지요. 지금은 일산에서 둘째 아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 마지막으로 보탤 말이 있으시다면요?
"박정희에게 최고의 가치는 분단을 유지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자신의 그 최고 가치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앞서가던 사람들이 바라던 민주화, 통일, 외세 문제의 해결. 지금도 정부나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내용 아닌가요. 그 분들이 그걸 선구적으로 문제제기했던 것이죠.

없는 사건을 만들어 완전히 조작해서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우선하겠지만, 이 분들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의지를 높이 평가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명예회복이고 복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 기사는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에도 실립니다.


#인혁당#박정희#유신독재#황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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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시민입니다. 현재 참여연대(www.peoplepower21.org) 실무자로 '민생희망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생들과 다양한 강좌 프로그램도 종종 진행하고 있습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희망의 되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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