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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진(49)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민사항소8부)가 6일 오후 <오마이뉴스>에 '사법개혁의 실천-대법원의 자성을 촉구하며'란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이용훈 대법원장 퇴진을 주장해 '주의 조치'까지 받은 정 판사는 이번 글에서 사법개혁을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편집자주>
▲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인혁당 사건, 긴급조치 위반 사건 등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 독재권력이 사라지고 민주화된 지금 사법권력은 한국 사회의 중심에 서서 국민 생활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수년간의 사례만 보더라도 정치·경제·사회 등 각계각층에서 중요 인물들이 사법부의 심판을 받았거나 받고 있고, 중요 국책사업이 사법부의 판단에 따라 사업진행이 중단되거나 속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법작용이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 현 상황은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다. 국민 모두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사법권력이 신뢰받지 못한다면, 패자는 그 판결에 승복할 수 없고 승자도 그 승리를 자랑할 수 없다. 사법신뢰는 모든 이의 문제다.

사법개혁 관련 법안들의 국회 통과가 시급하다

그렇다고 그저 사법부를 비난만 하고 있거나 자성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십여 년 전부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국회에 제출돼 있는 사법개혁 관련 법안들의 국회 통과다. 아직도 이 법안들 중 일부만 통과하고 일부 법안들은 심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의 직무유기를 성토만 하고 있는 것은 실효성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국민과 언론 기관 모두 나서서 그들을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질책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들의 성실한 입법업무 수행을 촉구하는 서신이나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고, 헌법상 보장된 다른 평화적 표현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더 조직화된 입법촉구활동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 과제는 일부나마 통과된 사법개혁 법률안을 엄정하게 시행하는 것이다. 개정된 법관징계법, 검사징계법, 변호사법 등 법조윤리 관련 법규들은 엄정하게 집행돼야 한다. 나아가 그동안 사문화돼 있었다고 할 정도로 활용도가 낮았던 법관·검사 등에 대한 탄핵소추, 탄핵심판 절차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부 판검사들이 심정적으로 반발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잘못에 엄격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다음은 사법의 투명성이다. 법원의 모든 재판진행 절차가 법원 홈페이지를 통해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듯이 검찰, 경찰, 변호사 등 기타 영역에서도 수사기밀, 프라이버시 부분 등을 제외하고 가능한 모든 범위에서 투명성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심지어 택배 물건조차 소비자에게 배달되기까지 이동경로가 실시간 추적되는 고도 정보화 사회에서 고액의 보수를 지급받고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법인이나 개인 또는 국가예산으로 운영되는 검찰, 경찰 등 행정조직이 위와 같은 투명한 서비스를 제공 못할 이유가 없다.

판결파일·재판정보 등 국민 일반에 공개해야

나아가 재판절차는 물론 검찰, 경찰, 변호사 기타 영역에서의 절차도 본래 기능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녹음 또는 녹화가 실시되도록 제도적 장치가 완비돼야 한다. 이러한 장치는 법조비리를 원천적으로 해소하는 데 가시적인 기여를 하게 됨은 물론 법정 소란행위 등에 대한 채증 기능도 겸해 권위 있는 법정질서 확립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재판진행 녹음파일을 비롯해 법원 전산시스템에 저장돼 있는 판결파일, 재판정보, 기타 정보공개 대상이 되는 모든 정보를 개별 국민의 정보공개 청구를 기다리지 않고 국민 일반에 공개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국민이 법원을 더 잘 이해하게 됨은 물론 논란 많은 전관예우 문제와 관련해서도 과연 전관 출신 변호사들이 실제 재판과정이나 재판결과에서 우대받고 있는지, 받고 있다면 어느 정도 받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전관예우라는 것이 없는데도 사건 당사자가 언론보도나 소문만을 근거로 고액의 선임료를 주고 전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고 전관 출신 변호사들이 불로소득을 얻게 된다는 점, 전관예우가 있다면 징계처분·형사처벌·탄핵소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관계자를 단죄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위와 같은 확인 작업의 실천적 의미는 매우 크다.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 양형편차 해소를 위해 양형기준제뿐 아니라 양질의 양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확충도 고려해야 한다.

양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은 일본, 호주, 영국, 미국 일부 주 등에서 오랫동안 시행해온 것으로서 전산으로 처리되므로 다른 어느 방법보다 정확성을 보장하며, 국민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종전 양형례를 검색해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양형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관들 스스로 사법권 독립을 수호하면서 권력이나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른 소신 재판을 하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 긴급조치 위반 사건 등에서 사법부의 과거 판결 내용이 문제가 됐다. 당시 상황에서는 실정법에 따른 법적용이며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변명들도 나왔지만, 필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부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투옥되고 고문 받아 불구자가 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지만, 법관들이 소신 재판을 했다는 이유로 똑같은 피해를 당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권력이나 인사권자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재판을 한 사람들이 출세가도를 달려 고위 법관이나 대법관을 하고, 퇴직 후에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 이용훈 대법원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독재권력 시녀 노릇한 과거, 변명 말고 사죄해야

사정이 이러한데도 관계자들이 당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변명만 할 수 있는가? 최소한의 사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신헌법에 찬성 투표한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가? 아무리 국가권력이나 국민 대중이 압박해도 법과 양심에 따라 소신재판을 하는 것이 사법권 독립 아닌가?

유신시절 정작 본인은 형사재판을 별로 담당하지 않았던 대법원장이 말로만 과거사를 반성한다고 하면 모든 것이 청산된 것인가? 반성한다면 당시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든 법관들이 다 그랬는지, 무죄 판결이나 비교적 가벼운 양형을 한 법관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무죄판결 등을 했다고 해서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한 것 외에 다른 불이익을 당한 것이 있었는지 분석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제도를 정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법관들 일부라도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고 재판하는 일이 없도록, 법에도 없는 고등부장 승진제도는 사실상으로도 폐지돼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전관예우 의혹으로 국민의 불신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진상을 소상히 밝히고, 획기적 개선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법원이 제대로 된 반성과 사법개혁을 하지 못하는 경우, 법원은 사법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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