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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허세욱씨.
ⓒ 운수노조
1970년 11월 13일, 한 청년 노동자는 자기 몸을 불살랐다. 존재는 있으나 가치와 의미는 없었던 허울뿐인 '근로기준법'과 함께 그는 한줌의 재가 되었다.

그의 분신은 많은 이들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가 살아있었을 때 목이 터져라 외쳤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슬금슬금 퍼져 나갔다. 결국 그의 분신은 유신정권 반대투쟁이 노동계급의 생존투쟁과 결합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 소위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잡았다는 2007년 4월 1일, 또 한명의 노동자가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택시노동자 허세욱. 손가락을 죄다 잘라내면서 어렵게 수술을 진행했지만 그는 결국 우리 앞에 다시 설 수 없었다. 그리고 37년 전 전태일의 분신을 기억하듯, 우리는 오늘 허세욱을 기억한다.

강요된 자살, 택시노동자의 분신

가장 극단적인 투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분신은 현실 모순에 대한 절망과 비관의 표시로서, 어쩔 수 없는 시대 조건과 감당할 수 없는 물리력 앞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강요된 자살이다.

이런 분신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일어났다.

첫 번째는 공권력과 자본의 물리적 억압에 직면한 긴박한 투쟁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분신이다. 처음에는 물리적 탄압을 저지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 수단의 성격을 갖다가 이를 무시한 폭력의 지속 상황에서 누적된 분노로 폭발하는 것이다.

주로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자원으로 거대한 공권력과 사측에 맞섰던 영세업체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는 우발적인 분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86년 3월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은 일당 1120원 인상을 주장하다 쇠파이프와 벽돌로 무장한 경찰과 구사대 앞에서 몸을 불살라야 했고, 1989년 9월에는 역시 구사대의 폭력과 공권력의 진압에 맞서 주방용품 생산업체인 경동산업에서 노동자 4명이 분신하고 2명이 할복하여 이들 중 두 명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극단적인 순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한 심정에서 자행된 분신은 당시 노동현장의 절박한 현실을 항변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형태는 극단적인 자기희생을 통해 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운동의 대상과 방관자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정치적' 분신이다. 허세욱의 분신과 같은 정치적 분신은 87년 6월 항쟁 이후 우발적 분신보다 많이 일어났다.

분신이라는 극단적 행위는 어떤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 제도적 경로가 모두 차단된 절망의 상황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소위 '민주화' 시대의 출발이라고 하는 87년 이후 정치적 분신의 확대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진전됐다는 담론의 허구를 폭로하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이 제도화된 방식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없는 조건에서, 자기주장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자신의 삶(목숨)을 던져 그 참됨을 입증하는 것이다.

민주화 세상 왔다는데, 그는 왜 분신했나

▲ 한미FTA 막판협상이 열리는 1일 오후 분신한 허모씨가 여의도 한강 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호중
따라서 정치적 분신은 자기 자신의 희생을 통해, 지배세력의 위선에 대한 폭로뿐만이 아니라 무관심한 이들의 관심 그리고 동료들의 각성을 요구한다.

잇따른 분신으로 인해 '분신정국'으로 불렸던 1991년 5월 투쟁에서도 분신의 '정치적 메시지'는 노태우 정권보다는 오히려 현장을 떠나 현실에 안주하려는 동료들에게 향했다.

"제 길이 2만 학우 한명 한명에게 반미의식을 심어주고 정권타도에 함께 힘썼으면 하는 마음에 과감히 떠납니다. 불감증의 시대라고 하고 무관심의 시대라고도 하는 지금 명지대 학우의 죽음에 약간의 슬픔과 연민을 가지다가 다시 제자리로 안주해 커피를 마시고 콜라를 마시는 2만 학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91년 명지대 강경대의 사망 이후 분신한 전남대학교 박승희의 '유서')

극단적 자기희생으로써 분신은 현실의 삶 속에 안주하려는 많은 이들을 각성시키는데 일시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과 자본은 '분신효과'를 차단하기 위해 분신자살의 '자율성' '순수성'을 훼손하는 데 안간힘을 썼다.

91년 5월 투쟁정국에서도 일부 지식인, 종교인 등이 분신의 의도를 의심하는 각종 발언과 칼럼을 발표했고, 심지어는 "죽음을 조종하는 선동세력" "자살특공대" 등의 언사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생명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식의 담론을 유포하기에 바빴다.

이 와중에 사법당국은 전민련 전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근거 없는 혐의로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을 구속하여 실형을 선고하는 '사법적 사기' 행위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세력의 여론조작보다 더 힘든 싸움 상대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희생의 충격은 감소하였고, 일상으로의 퇴로를 차단당했던 사람들은 우회하는 길로 다시 들어섰다. 인간이 가진 망각은 또다시 반복되는 '소외된 자'들의 분신을 불러 왔다.

살아남은 이들의 몫, '기억'

허세욱의 죽음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한 지금도, 우리는 2007년 1월 23일 노조위원장의 임금삭감 직권조인에 항거해 분신한 택시노동자 전응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2003년 11월 대구 공장에서 분신한 이현중과 이해남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2003년 10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한 이용석의 이름도, 2005년 말 쌀 수입개방 반대를 요구하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한 정용품과 오추옥의 이름도 우리의 뇌리에는 남아있지 않다.

이 글을 쓰면서 참여정부 이후 분신열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없었다. 매년 나오는 열사 달력에 이름이 월별로 정리되어 있을 뿐이다. 각종 열사관련 인터넷 게시판에는 참여정부 이후의 자료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으로 먼저 간 이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정당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 제도적 경로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분신은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 경로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앞으로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은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허세욱씨의 자기희생은 한미 FTA 투쟁을 관성적으로 대했던 많은 이들과 자기이해를 중심으로만 사고했던 이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

그러나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지금의 시간이 지나 한 달 후, 일 년 후에도 그를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면 제 2, 제 3의 전태일이 나타났듯이 또다른 허세욱이 출현할 때만이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분신의 도덕성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들의 동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분신을 통해 우리의 망각을 각성시키려는 행동들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오늘 허세욱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를 직접 만나봤고 아니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혹자는 택시에 한 묶음의 유인물을 쌓아 놓고 승객들에게 나눠줬던 모습을 기억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적은 월급을 쪼개서 많은 단체에 기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도 있다. 이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그의 인생의 한 조각이라도 움켜쥐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분신투쟁의 도덕적 정당성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만이 또 다른 허세욱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지인은 허세욱씨와 만났던 한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맺는다.

"예전에 효순이 미선이 투쟁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허세욱씨를 비롯한 100여 명 사람들이 부모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그 때 아버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아이 사건을 이용해서라도 여러분들의 목적하는 바를 꼭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행사가 끝난 후 마을 회관 입구는 신발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주 혼잡했다. 신발을 찾다가 뒤를 돌아보니 허세욱씨가 아버님의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온 게 아닙니다. 그저 억울하게 숨진 어린 목숨들이 너무 가여워서 온 겁니다.'

그의 눈에 맺혀 있었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허세욱 씨의 장례일정(2007년 4월 18일 수요일) 

오전 7시 30분  발인(한강성심병원) 
노제 1            한독운수(관악구에 위치) 
노제 2            하얏트 호텔 앞 
노제 3            용산미군기지 
낮 12시        장례식(서울시청 앞) 
오후 3시 40분  하관식(마석 모란공원) 
저녁 7시         범국민 추모의 밤(세종문화회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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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분신#망각#한미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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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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